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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02/08 21:49:06
Name   모선
Subject   최근에 한 어떤 게임의 후기
0. 누구에게나 인생 게임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수많은 게임들을 몇번씩 해보고 나서 인생 게임이 이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조금 다르다. 게임을 좋아하지만, 마음에 해야겠다는 의욕이 생기지 않으면 아예 손을 안 댄다. 대신 손을 대면, 정말 신물이 날 정도로 한다.
이런 까탈스러운 내 기준을 충족시킨 게임이 몇몇 있었는데, 10대 시절은 스타크래프트였고, 20대 시절은 문명5였고, 30대의 지금은 배틀그라운드였다.
이 중에서 인생 게임을 말하라고 하면, 당연히 스타크래프트를 꼽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인생 게임의 타이틀이 바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1. 우연한 기회
연구에 치이고, 코인은 떡락하고, 강추위 때문에 몸을 웅크리게 되는 1월의 우울한 어느날...
옆에 있던 후배가 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 후배는 많은 게임들을 한번씩 해보는 스타일이었다. 그날도 스팀에서 할인 마지막날이길래 질렀다고 한다.
플레이 화면이 꽤 재밌어 보인다. 후배는 재밌다고 하면서도, "이건 호불호가 엄청 갈릴 유형의 게임"이라고 했다.
후배의 컴퓨터와 계정을 빌려서 나도 몇 번 시험삼아 해보았다. 재미도 있고, 의욕도 생기는데, 스팀에서 할인이 이미 끝나버린 게 문제였다.
고민 끝에 DLC는 다시 할인 시즌이 올 때에 사고, 일단 본편만을 지르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렇게 시작했다. 영어 약자로는 ETS2, 한국인에게는 유로 트럭으로 알려진 그 게임을...

2. 묘하게 중독된다.
유로 트럭이라는 이름은 옆동네 게시판에서 몇 번 들어보기는 했다. 그 때만 해도 2018년에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게임을 실행하니, 본인의 프로필을 만들고, 스타팅 포인트를 정하라고 한다. 구석에서 조용히 성장해야지^^ 라는 마음으로 에든버러를 골랐다.
나름 스코틀랜드의 수도니까 괜찮겠지? 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시작부터 낭패다 -_-;;
튜토리얼부터 시작하는데, 아뿔싸...영국은 핸들이 오른쪽에 있고, 왼쪽으로 다니지!!!
"그래. 내 인생에 영국처럼 차를 몰 일이 없을 테니 게임을 통해 간접 체험이라도 하자." 그렇게 고생의 문이 열렸다.
"진짜 이놈들은 왜 대체 마일이랑 야드를 쓰는거야?! 그 좋은 미터법을 놔두고, 노답이네."
"이 회전교차로는 진짜 근본이 없네 ㅡㅡ;; 아니 AI 차량들은 왜 회전교차로에서 정지를 안해?!"
숱하게 속도 위반으로 벌금을 물고, 현실에서는 내가 2:8 또는 1:9로 나올 교통사고도 게임 내에서는 무조건 짤없이 100대0으로 벌금을 물었다.
신호등 없는 교차로에서 우회전하는 것은 진짜 지옥이었다. 트레일러 파손은 심심하면 한번씩 벌어져서, 돈이랑 경험치 까이는게 예사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것 묘하게 중독된다.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킨다고 해야 할까? 때마침 스팀의 도전과제 항목을 보니, 맵 100% 탐험이 있었다.
결국 100% 탐험을 하려면, 좋든 싫든 영국을 지나가야 하니,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끝판왕부터 해치우겠다고 다짐했다.

3. 영국 정복기
최북단 애버딘부터 시작해서 플리머스, 사우샘프턴, 런던, 도버로 가는 길은 너무나 멀었다.
먼 길을 달리는 것도 어렵지만, 맵 100% 탐험을 위해서는 도시에 있는 모든 시설을 한번씩은 들락날락 해야 하고,
일부의 휴게소나 주유소로 빠지는 통로는 별도의 루트로 판정되기 때문에, 동선을 잘못 짜면 지겨운 장거리 운행을 계속 뛰어야 했다.
그러던 와중에 스팀 도전과제에 10,000km를 달리기 전에 20,000경험치를 쌓는 항목을 발견했다.
이미 시작한 주 캐릭터는 장거리에 특성을 찍은 상태라 이미 물건너간 상태이므로, 업적 달성을 위해 캐릭터를 따로 생성했다.
그렇게 산전수전 다 겪다 보니 업적도 완성하고, 월드맵에서 영국 지역은 노란색으로 빛이 났다.
예전에는 국도로 가는 길이 그렇게 싫었는데, 이제는 국도에서 경찰의 눈을 피해 내리막길을 내달리는 것이 하나의 쾌감이었다.
그것보다 더욱 기분이 좋은 일은 괜찮은 스펙의 개인 트럭을 살 돈이 생겼다는 것이다.

4. 라디오와 함께
나무위키를 보니, 무조건 라디오를 추천하는 것이었다. 인터넷을 열심히 뒤져서 한국 라디오를 "in-game 에서" 들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사실 인터넷 라디오를 들을 수 있는 방법 자체는 많지만, 어플을 까는 것이나 다른 인터넷 창을 여는게 귀찮아서 최대한 in-game 세팅을 활용했다.
라디오는 정말 필수였다. 게임의 특성상, 운전의 묘미가 처음에는 끌릴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정말 지루하게 만들 수 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만약, 라디오 기능이 없었으면 이 게임은 나의 인생 게임 반열에 못 올라갔을 것이다.
지금은 라디오 듣는게 메인이고, 그냥 듣기는 심심하니까 손으로는 게임을 한다. 나중에 진짜 차를 사면, 드라이브가 나의 취미가 될련지도...?
아무튼, 라디오를 듣기 시작하면서 우울함과 스트레스가 조금씩 해소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러 채널을 왔다 갔다 하면서 들었는데, 지금은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SBS의 라디오를 메인으로 듣고 있다.
가끔씩 옆동네 스연게에 올라오는 '배성재의 텐'은 정말로 재미있다. 웃는데 정신 팔려 있다가 게임에서 충돌 사고를 낸 적도 있었으니...ㅠㅠ
그동안 무관심했던 가요도 자연스럽게 듣게 된다. 선미, 청하, 오마이걸, 모모랜드 등등... 특히 레드벨벳의 Bad Boy는 하루에 한번씩 꼭 나왔다!
빨리 퇴근하면 밤 8시, 보통은 밤 10시부터 그렇게 새벽 2시까지 달린다. 모든 일상의 근심을 잊어버린 채로...

5. 아버지가 많이 생각난다.
아버지는 택시운전을 평생 하셨다. 그래서 나도 아버지를 통해 택시기사들의 일상에 대해 보고 들은게 꽤 많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 원망도 많이 했고, 지금도 마음 한 구석에는 서운함이 많다. 자상한 모습보다는 불같은 성격만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택시운전이라는 직업은 그런 성격을 고치기에 너무도 부적합한 일이었다. 나는 그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씩 이해가 된다. 어처구니 없게 벌금을 물 때마다, 사고가 나서 트레일러가 손상될 때마다, 새벽 1~2시쯤 손가락이랑 허리가 아플 때마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서 꺼내는 첫마디가 다 이런 말들이었기 때문이다. 딱지를 떼었다, 차가 손상되었다, 다리가 너무 저린다 등등...
아버지가 개인 택시를 받았을 때의 기분이, 내가 처음으로 개인 트럭을 구매하고 비로소 사장이 된 기분을 느꼈을 때보다 훨씬 좋았겠지?
이번 설에는 아버지랑 따뜻하게 대화하는 아들이 되어야겠다.

6. 내 인생 게임으로 충분한 자격이 있다.
현실에 가까운 운전 자체의 재미 + 라디오라는 부수적 재미 + 인생의 철학(?) 까지!
빨리 본편에서 맵 100%를 찍고, (나중에 할인이 뜰 때) DLC도 사고, 후속작인 아메리칸 트럭도 할 생각이다.
글을 쓰고 나니 어느덧 밤 10시가 되어 간다. 오늘은 그저께부터 진행했던 베네룩스 정복을 마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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