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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7/29 16:02:00
Name   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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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최근에 깨달은 커피 맛




저도 제 전공분야에 대해선 예리하고 디테일한 판단을 위해 열심히 수련중입니다만,
그 외의 분야 - 예를 들면 미각 - 에선 거의 전병 수준이라 자주 부끄러운 경험을 합니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술을 못마시는 편은 아닌데,
제 주변인들도 술을 잘 안하는 주의고, 주도문화가 활발하거나 강요되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지 않다보니 즐겨마시는 편은 아닙니다.
가족들도 술담배를 아예 안하니, 술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어요. 막상 마시면 의외로 많이 마실 수 있어 저도 놀랍습니다만...
(5년 전에 질문도 했었네요. http://pgr21.com/?b=9&n=91383)

하지만 다른 기호식품들은 즐기는 편이죠.
탄산음료같은 경우엔 하루에 1.5L 한 병씩 비우는 수준이고...
담배도 요즘 좀 줄여서 하루에 0.8갑정도... 커피도 머그잔에 두세잔은 꼭 마십니다.

저는 제 미각이 그렇게 예민하다거나 까다롭지 않다고 느꼈는데,
'음식'에서야 수요미식회 전현무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만,
기호식품에 있어서는 주변에 물어보니 거의 타협이 없는 수준이더군요.

예를들면 콜라가 펩시일 경우 차라리 그냥 물을 마신다거나, 담배가 떨어져 지인이 1미리 권하면 그냥 안피우고 거부...
의식적으로 그런 건 아니었는데, 주변사람들에게 인식될정도로 반복적이었고, 부분적으로 신기하게 비춰진 모양입니다.

제가 커피를 배운건 일을 잠시 쉬면서 놀고있을 백수시절, 한국에 귀국한 후배랑 자주 만나면서였습니다.
하루 일과가 점심때쯤 프렌차이즈 커피점에 나가 흡연실에서 담배 한 갑 다 태울때까지 안나오면서 수다떨고,
저녁때쯤 극장에서 영화한 편 보는 것이었으니 지금으로선 거의 신선놀음하던 때였었죠.
그때 한창 요리를 공부하던 후배가 저한테 세 가지를 가르쳐주었는데, 커피, 와인, 위스키였습니다.
믹스커피를 제외하면 생애 가장 처음 먹어본 커피가 후배가 주문한 에스프레소였는데,
작은 잔에 담겨 나온 새카만 음료가 신기한것도 있었고, 뭔가 돈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죠.
물론 한모금 마신 후 입도 다시 안댔지만요.

처음에는 그냥 남들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로 일관된 주문을 했는데,
사실 아메리카노보단 모카라던지, 마끼야또라던지, 단 음료가 좋았습니다. 너무 비싸서 자주 먹을 수가 없었을 뿐.
어느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아하지도 않는 아메리카노를 왜 매일 돈주고 먹어야되는거지?
그래서 의식적으로 커피집 메뉴를 찬찬히 훑어봤죠.
요즘이야 아메리카노를 원체 안좋아하다보니 라떼를 시키거나, 자주 가서 아는 집이라면 카푸치노를 주문하겠지만,
당시엔 메뉴판에서 이름은 안보이고 가격만 보이더라구요.

그리고 그 날 프렌차이즈 커피숍에서 따로 메뉴칠판에 분필로 적어둔 오늘의 커피가 눈에 띄어 처음 먹게 된게 드립커피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일단 가격이 싸고(결정적인 이유...), 뭔가 밍밍했던 아메리카노보다 맛이 좋은 것 같아서 먹기 시작했죠.

그 당시 제게는 매일매일 달랐던 오늘의 커피 맛을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 능력 밖에 없었습니다.
프렌치 로스트 / 나머지 종류
지금도 뭐 그렇게 원두 종류나 로스팅을 세세하게 구분해가면서 먹진 않는데,
커피 좀 아시는 분이라면 뭔가 실소가 터져나올수도 있는 구분법일겁니다.

저는 그냥 단순하게 겁나 쓴 커피 / 그리고 덜 쓴 커피 이렇게 구분한 거거든요. 아무것도 모르고.
제가 과일을 안좋아하는 편이고, 신맛나는 과일류는 더 안좋아하는 편이라 이상하게 신맛은 안땡겨서(지금보면 과일 신맛이 커피 신맛이 아닌데...)
극단적으로 쓰기만 한 프렌치 로스트를 찾아먹기 시작했죠.

그렇게 그 프렌차이즈의 프렌치 로스트만 5년 먹었습니다. 요즘엔 매장에서 드립커피를 잘 안 사마셔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프렌차이즈는 오늘의 커피 메뉴가 없거나, 프렌치 로스트가 나오는 경우가 굉장히 드물더라구요.
담배도 레드, 음료도 마운틴 듀/코카콜라의 극단적인 취향(???) 때문인지, 제가 좋아했던 쓰기만 한 프렌치 로스트는 생각보다 대중적인 커피가 아니었나 봅니다.
보통 케나 AA,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콜롬비아 수프리모 이 셋이 가장 자주 보였구요.

지금도 뭘 알고 마시는 건 아닙니다.
담배 1미리 안피우는건 8미리만 피우다보니 1미리는 피워봤자 돈만 아까워서,
코카콜라만 먹었던건 다른거 먹으면 맛탱이가 없어서...
커피도 마찬가집니다. 뭘 알고 먹는게 아니라, 신맛 = 맛없음으로 인지하는 절정의 단순성 때문에 그런거지,
이 커피에는 나만 알고 있는 매력이 있어! 같은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요즘 편집실 들어와서 처음으로 로스팅 된 원두 배송받아 직접 핸드 그라인더로 갈아서 내려마시는데,
드립커피는 많이 마셔봤어도, 제가 내려먹는건 또 처음이라 이건 새로운 세계(혹은 난관)이 펼쳐졌습니다.
양조절을 못하니 맹탕이 될 때도 있었고, 좋은 원두를 사약덩어리로 만들어 편집실 식구들 미간에 주름을 새기는 날들이 반복될 무렵,
(이상하게 제가 내리면 대부분 쓴맛이 지배하더라구요. 제 입맛에도 쓴데, 같이 먹는 사람들은 얼마나 썼을까요.)
아는 선배가 이 커피 맛있겠다, 하고 편집실에 넘겨준 원두가 제가 처음 먹어몬 에티오피아 예가체프였습니다.

편집기사님이 직접 갈아서 내려준 예가체프 드립을 먹는데, 그때 처음 느꼈습니다. 아, 이래서 커피먹는 사람들이 신맛 신맛 하는구나!
신맛 = 맛없음이라는 인지를 뛰어넘는 매우 맛있는 신맛이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내려보겠습니다 하고 직접 예가체프를 갈아서 내려봤는데 결과는 폭망...
그렇게 맛있는 신맛커피를 쓰게 만들 수도 있다는걸 그때 배웠습니다.

이 후에 선물받은 블루마운틴도 한 번 내려먹어봤는데, 맛이 풍부해서 좋았던 기억은 있는데,
처음 먹었을때 느낀 충격 때문인지, 예가체프가 가장 강렬하게 기억이 남더군요.
제 손을 타면 신맛이 없어져서 요즘 맹렬히 연습하고 있는데, 늘긴 늘었지만 잘 안됩니다.

아...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프렌치 로스트만 줄창 먹었을때가 좋았던것 같기도 하네요.

집에서 드립커피 먹을때 맛있게 내리는 팁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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