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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11/08 10:21:33
Name   매일이수수께끼상자
Subject   푸른 색이 슬프지 않기를
사람마다 아픔의 색깔은 다를 것이다. 첫사랑을 보낸 아픔은 그 사람이 입었던 옷의 색깔과 비슷하거나 시험점수로 인한 아픔은 빨간색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 아픔이 다른 아픔에 가려질 때까지, 우린 다양한 색깔의 아픔을 품고 살아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 둘 먼 곳에 떠나보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회색빛 담은 퍼런 색깔이 가장 아픔에 가까운 색깔이리라. 모든 온기어린 기억을 적막함으로 되돌려 보내는, 어스름과 같은 그 사람의 마지막 피부색 말이다.

그 퍼런 아픔은 그리움을 동반한다. 과거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미래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 이와 다녔던 골목길, 같이 웃던 일들, 싸우고 등 돌렸던 지난 사연들이 죽음 직후에 퍼렇게 퍼렇게 밀물처럼 턱밑까지 밀려든다면, 일상으로 돌아온 뒤 그 사람의 빈 자리에서는 같이 나이를 먹고 같은 이야기를 써내려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썰물처럼 시립게 빠져나간다. 그리움이란 건 얼마나 깊은지 이 시린 썰물은 몇 년을 빠져나가도 그 끝을 보이지 않는다.

요즘 나라의 가장 중요한 결정들이 내려진다는 푸른 건물에서 자꾸만 퍼런 아픔들이 맺힌다. 모두가 힘들었던 지난 몇 년의 삶이 고작 한 명의 무당에게 휘둘러진 거란다. 그걸 오늘 대통령께서는 인정하셨다. 사이비 종교인, 그것도 온갖 의혹의 대상이며 자기 스스로도 구린지 독일로 가 잠적한 자가 통치의 배후에 있었다는 것이 서글프다. 오늘 대통령의 짤막한 사과문에서도 그 무당의 빨간펜 흔적은 썰물처럼 가고 없었다. 최소한의 의리도 없다. 대통령은 무당에게, 우린 대통령에게 버림받았다.

IT 보안 분야의 기자라면, 대통령이 그 동안 ‘어려울 때 알게 된 지인’에게 유출시킨 문서들 중 국가기밀은 없는지 물어야 하고, 내부자로 인한 보안 사고를 분석하며 힐러리 클린턴의 개인 이메일 사건이 어떤 식으로 다뤄졌는지 비교 분석해야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PC를 직접 관리하지 않아 결국 입수하도록 해, 결국 대통령의 첫 사과문까지 이끌어낸 최순실의 허술한 정보보안 감각에 감사해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민주주의의 죽음을 이야기하며 한탄할 때 정보보안 계통에 몸담아 적지 않은 기사를 써온 마음은 취약점 발견 그 이후를 말하고 싶다. 사랑하는 가족 하나 둘 보낸 경험을 가진 나이대의 평범한 일반인으로서의 처지가 죽음은 끝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들물과 날물처럼 목을 조여 오는 아픔들이 내 깊은 밑바닥을 아프게 긁어대면 댈수록 필사적인 자맥질이 필요하더라, 라고 말하고 싶다. 대통령의 사과로 우리가 알던 민주주의가 부관참시된 것일지 몰라도, 죽음의 그리움에 묻혀서는 시퍼런 죽음의 색만 상복처럼 짙어진다.

숱한 취약점을 이기는 건 진득한 패치뿐이다. 빈 사람의 자리는 새 사랑으로 메워진다. 죽음을 이기는 건 생명뿐이다. 취약점 발견했다고 보고하고 기록을 쌓아두고, 이걸 이렇게 불완전하게 만들었다고 개발자나 제조사를 겨냥해 비판하는 건 쉽다. 죽음이 지나간 자리에 주저앉아 화내고 원망하기도 어렵지 않다. 그 자리를 딛고 일어서서 눈물을 닦고 같은 소설을 써내려가 줄 누군가를 찾는 것은 어렵다. 내 자식 같았던 코드를 다시 들여다보며 수치와 같은 약점을 스스로 고치거나, 사용자로서 잠잠히 기다려주는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해오던 일이다. 매일 습관처럼 들여다보던 각종 취약점 보고서들, 그걸 해결하기 위한 어느 보안 연구원의 보이지 않는 패치 개발과 배포, 사이버 범죄라는 공통의 적을 맞아 어느 덧 저주처럼 유전자 깊이 박혀있는 경쟁의 논리에서 탈피해보려는 보안 산업 각계각층의 다양한 노력들이, 나라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이때에 돌아보니 작지 않은 용기들이었고 필요한 자세였다. 마치 이때를 위해 훈련의 때를 지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패치를 해오던 기억에 우린 생각보다 건강하다.

그 패치가 마침내 네이버 실검 1위에 오른 ‘탄핵’인지, 조선일보 실용한자 코너에 등장한 ‘하야’인지, 혹은 오늘의 그 녹화된 2분짜리 사과의 납득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어느 것도 쉽지 않은 과정이 될 것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그 어떤 과정이라도 죽음의 퍼런 기운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기를 바란다. 푸른 기왓장에 새겨진 그 건물의 상징적인 색깔이 퍼런 죽음이 아니라 몽고반점 가진 아이들의 넘치는 생명력 닮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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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과문 듣고 쓴, 특정 분야에 치우친... 좀 지난 낙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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