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5/10/13 12:36:41
Name   damianhwang
Subject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http://www.poemlane.com/bbs/zboard.php?id=notice3&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63

오늘따라 왜 이게 생각나나 몰라요;;
아주 옛날 분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남 얘기가 아니네요. 쩝;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0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864 도서/문학비극적 영웅의 조건 7 팟저 15/12/25 8400 5
    1856 도서/문학유럽의 교육 - 로맹 가리 27 마르코폴로 15/12/23 7303 1
    1845 도서/문학루살카에 대한 기억, 하일지의 진술을 읽고 30 김나무 15/12/22 7032 5
    1785 도서/문학<암흑의 핵심>이 식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은 이유 9 팟저 15/12/16 8743 2
    1768 도서/문학<진술> - 하일지 40 마르코폴로 15/12/14 9075 2
    1766 도서/문학새로 지정된 표준어들 (이쁘다, 찰지다 등...) 17 西木野真姫 15/12/14 6351 3
    1752 도서/문학당신은 누구 입니까? 30 Beer Inside 15/12/11 6537 4
    1701 도서/문학인문학, 그리고 라캉 다시 읽기 85 뤼야 15/12/04 10258 8
    1696 도서/문학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12 마르코폴로 15/12/03 6746 6
    1638 도서/문학라캉과 들뢰즈를 읽어야 할까? 66 뤼야 15/11/26 10496 2
    1535 도서/문학자승자박 : 동녘 출판사가 사과문을 게재했습니다. 38 구밀복검 15/11/12 7375 0
    1503 도서/문학D.H 로렌스로 읽어보는 실존의 여성과 나 29 뤼야 15/11/09 11943 1
    1415 도서/문학[2015년 노벨문학상]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여성은 전쟁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14 다람쥐 15/11/01 10453 9
    1406 도서/문학모옌 [열세걸음]으로 생각해보는 세계문학 35 뤼야 15/11/01 10858 3
    1380 도서/문학[조각글] 홍차넷 발 문학 소모임입니다. 15 얼그레이 15/10/30 9220 0
    1369 도서/문학김영하 산문집 [말하다] 중에서 27 삼공파일 15/10/29 12103 6
    1335 도서/문학내포저자 - 간절히, 아주 간절히 이야기하기 18 뤼야 15/10/25 11977 1
    1333 도서/문학[모집] 조각글 모임(문학 합평) 인원 모집합니다! 32 얼그레이 15/10/24 9734 0
    1244 도서/문학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2 damianhwang 15/10/13 8225 0
    845 도서/문학"걸리버 여행기"를 부탁해... 9 Neandertal 15/08/26 5689 0
    730 도서/문학[리뷰]필경사 바틀비 - 허먼 멜빌 13 뤼야 15/08/05 10281 0
    701 도서/문학사라, 쥬디, 앤 그리고 블루 - 여자와 아버지 7 뤼야 15/08/02 7000 0
    674 도서/문학너무 유창한 화자의 문제 26 뤼야 15/07/29 9600 0
    604 도서/문학당신이 죽기 전까지 읽어봐야 할 50권의 책... 19 Neandertal 15/07/17 7677 0
    515 도서/문학[한밤의 아이들]과 퀴어퍼포먼스로 읽어보는 시선과 권력의 이야기 16 뤼야 15/07/05 8472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