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12/06 17:56:11
Name   한달살이
Subject   옆사람
말년휴가를 나와서 군복을 갈아입기 전에 학교를 갔다.  정확히는 학회실.  나의 아지트. 나중엔 우리의 아지트.
술담배에 쩔은 그 큼큼한 냄새가 그리웠다.
도착한 시간이 마침 수업시간이라 아무도 없었다.  할것도 없고, 졸립기도 해서, 전기난로를 가까이 두고 누웠다.

"전투화는 벗고 들어오셔야 하는데..."
조그마한 숨어들어가는 목소리. 들으라고 하는게 아니고, 안들리게 하려고 일부러 머금는 듯한 말소리.
그게 첫 만남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많은데, 학번은 세개 낮은 후배.
긴머리이긴 한데, 미용실을 워낙 안다녀서 자연스럽게 길어졌고, 거의 야구모자를 쓰고 다녔던 후배.
남자만한 키에 마른몸인데다 약간 구부정하게 다녀서 좀 약해보였던 후배.
화장도 안하고, 렌즈도 못끼고, 굽있는 신발도 못신고, 청바지에 티셔츠나 남방을 입던 후배.
알면 알수록 이상한 후배. ㅋㅋㅋ

너무 자연스럽게 옆으로 와있어서.. 처음 사귄게 정확히 언제인지, 첫키스가 언제 어딘지 기억 못한다.
그래서, 남들 다 하는 백일, 일주년.. 그런 기념일을 한번도 못 챙겼다.  
나의 수많은 잘못중에서도 열손가락안에 꼽히는 잘못이다. 미안.

"미안해요. 선배님. 늦었어요."
약속시간 한시간을 늦어서 헐레벌떡 뛰어와서 당황해서 했던말이다.
어이. 우리 사귄지 꽤 오래 되었거든? 서로 말 놓은지도 꽤 되었고.. 늦었다고 당황해서 도로 존댓말을 쓰는거냐? ㅋㅋㅋㅋ

술도 못마시고, 입에 거미줄이 생길 수준으로 말도 없고, 행동도 느린데다..조용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라서 실수도 안한다.
그래도, 소리없이 잘 웃는다.  그 웃는 모습이 이뻐보였다.
사귄 이후부터는 그냥 일년내내 옆에 있었다. 애교도 없고.. 그냥 조용히 옆에 있기만 한다.
같은 수업, 같은 조.. 심지어 2인1조 졸업작품도 같이 했다.

청첩장을 줄때 주변 사람들이 다들 엄청 놀랬다. 아직 서른이 되려면 몇년 남은 새파란 것들이 결혼을??
하긴 2월 졸업 12월 결혼은 내가 생각해도 비상식적이니까.. 어쨋든 12월 7일 대설에 눈 맞으면서 결혼했다.

15년.
아직도 옆에 있다. 옆사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
앞으로 옆에 있을거 같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

우리의 기념일이지만, 딸을 껴주기로 했다.  체험학습신청 내고 학교 땡땡이.
영화보고 인사동 걸어다니자고 한다. 그러기로 했다.  호떡이나 하나 먹고 오겠지. 추울듯.



26
  • 결혼은 추천
  • 주정뱅이는 추천
  •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2726 기타왜 범행일이 아니라 판결일로 집행유예 처벌이 달라져요? 6 집에 가는 제로스 22/04/15 7158 26
12710 오프모임[불판] Profit 하얀 결혼 예식 축하/후기 88 토비 22/04/10 5231 26
12598 기타[홍터뷰] 기아트윈스 ep.3 - 기아트윈스 인 메타랜드 9 토비 22/03/09 4051 26
12559 정치비전문가의 러시아 - 우크라이나 전쟁 향후 추이 예상 19 호타루 22/02/28 4092 26
12533 일상/생각강등&부서이동 7주차 13 Picard 22/02/21 4104 26
12379 일상/생각코로나19 무서워요... 흑; 22 *alchemist* 21/12/24 4576 26
12161 꿀팁/강좌여자 생활한복 경험담+코디팁+쇼핑추천(부제:남편이여 선물하라) 33 흑마법사 21/10/12 5462 26
11543 철학/종교사는 게 x같을 때 떠올려보면 좋은 말들 32 기아트윈스 21/04/02 6031 26
11265 사회홍차넷 운영 시스템에 대한 설명 10 호라타래 20/12/23 4178 26
13183 의료/건강와이프랑 10키로 마라톤 완주했습니다. 19 큐리스 22/09/27 4353 26
10580 일상/생각제주도에서의 삶 12 사이시옷 20/05/13 4622 26
10410 역사[번역] 유발 노아 하라리: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세계 11 기아트윈스 20/03/21 7638 26
10080 육아/가정만점 부모가 아니여도 괜찮아 5 Jace.WoM 19/12/14 6217 26
9414 요리/음식텀블러랑 워터보틀 나눔합니다 (마감) 56 먹이 19/07/09 5728 26
9096 일상/생각축구지를 펴내기까지... 그 나름의 철학 ㅋ 18 커피최고 19/04/18 4982 26
8794 여행그저그런의 일본항공 일등석 탑승 후기 (1) 36 그저그런 19/01/24 6432 26
8752 철학/종교율법주의 : 최후의 유혹 32 구밀복검 19/01/11 7458 26
8586 여행온천, 온천을 가보자 32 Raute 18/11/30 5421 26
10541 일상/생각큰고모님 4 Schweigen 20/05/02 4739 26
9220 일상/생각혼잣말을 하는 버릇 5 19/05/22 6016 26
7704 의료/건강의사쌤이 시킨 한달간의 금주+다이어트 후기 27 tannenbaum 18/06/17 9115 26
7367 일상/생각홍차넷 6 그럼에도불구하고 18/04/11 4124 26
6718 일상/생각옆사람 25 한달살이 17/12/06 4150 26
6491 일상/생각독일 대학원에서의 경험을 정리하며: 1편 18 droysen 17/10/30 5687 26
5027 일상/생각호구의 역사. 22 tannenbaum 17/02/27 5398 26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