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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5/09 22:24:43
Name   개마시는 술장수
Subject   어머니의 연애편지.
햇볕은 쨍쨍 대머리는 반ㅉ..

2014년 여름쯤이었다.
날씨는 무더웠고 무덥고 또 더웠다.
덥지 않은 여름이 있겠냐마는 그 날은 유독 무더웠던 것 같다.
평화로운 주말이다. 철저하게 인도어 파인 나는 움직이기도 더워죽겠는데 게임을 하며 쉬고 싶어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족과 동거하는 집안이 그렇듯 우리 집도 주말, 혹은 휴일은 대청소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싫다.

치열한 나날을 보냈는데 주말마저 무언가를 해야한다니.데이트도 술약속도 게임도 아닌 노동은 그저 귀찮을 뿐이다..
하지만 부모 이기는 자식이 없듯(?) 내 손에는 나도 모르게 먼지털이개가 쥐어져있었다.
'아 귀찮다.'
..라고 생각해봤자 소용없다. 천지가 개벽하여 나에게 나만의 짝이 생기지 않는 한 주말의 대청소는 나에게 주어진 숙명이자 의무나 다름 없으니.

책상을 연다.
오래된 나의 물품들을 정리한다.
안녕 나의 늙은 NBA 선수 트레이닝 카드여. 전에는 얼마만큼까지 몸값이 나가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네가 갈 곳은 재활용 쓰레기 봉투겠지.
서랍을 연다. 나의 국민학교(!) 시절을 함께한 따조여, 너의 시작은 500원짜리 오리온 스낵이었으나 20년이 넘은 세월 끝에 재활용 봉투로 들어가는구나.
장롱을 연다. 오래된 종이의 일기여, 너는.....잠깐 일기!? 나는 이런 종이에 일기를 쓴 적이 없다.
보통은 노트나 컴퓨터 안에 저장해놓는게 일반적.
자세히 보니 글씨체 또한 나와는 다르다.

먼지털이개를 놓고 천천히 종이 뭉치를 읽는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언급이 된다. 두번째 장이 넘어갈 때 쯤 확신이 든다.
이것은 내가 태어나기전에 어머니의 일기였다.
"XX씨는 정말 나를 사랑..."
흠... 조금 오싹하지만 내가 태어나기 전 신혼 때의 이야기들이 적혀있었다.
조금 닭살 돋는 표현도 있었고, 안타까움, 서러움 등이 느껴졌다.
뭐...좋다. 지금(사실 나는 많이 지났지만)의 자신처럼 나의 부모님에게도 내게 말씀하지 않은 청춘이 있었고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있었으리랴.

"엄마! 이거 봐바요."
어머니께 예전 일기를 드린다.
묘하게 복잡한 표정이시다. 지난 날들의 추억과 그리움, 후회, 미련 등 여러가지를 회상하는 어머니의 옆모습이 보인다.
한동안 오래, 꽤 한참동안 어머니는 편지를 손에서 떼지 못하고 계셨다.

묘하게 뿌듯한 기분이다. 어머니께 잃어버린 추억을 찾아드린 것 같아 기분이 좋기도 하고
무언가 두 분의 추억의 한 페이지를 옅본 것 같아 즐거웠다.
뭐...이 걸로 된걸까나.
다시 청소를 시작하고 이번엔 진공청소기를 꺼내든다.
청소기의 전원을 넣는다. 타는 냄새가 난다.
이크, 이 놈의 오래된 고물이 드디어 수명이 다했나보다. 모터가 타들어가는 것 같다.
어떻게할까...아직 대청소는 멀었고 청소기는 망가졌고...
AS는 언제 가능할지도 모르겠거니와 무엇보다도 청소를 하기가 너무 귀찮다.
떡본 김에 제사를 지내라고했다.
이 고물이 맛이 간 것을 핑계삼아 오늘은 조금을 쉬어야겠다.  

"엄마, 청소기 모터가 타는거 같은데..."
다함께 대청소를 하는 가운데 나 혼자 쉴수는 없기에 가족들에게 중지를 선언하기 위해 어머니를 찾았다.
먹힐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먼저 집안의 주도권을 가진 어머니께 허가를 구해야 할테니까 말이다.
대답이 없으시다. 베란다 문이 열린 것을 보아 아마 앞마당 멀티에 심은 화초에 물을 주고 계신 것 같다.
나는 베란다쪽으로 나가 다시 어머니를 불러본다. 하필 왜 지금 나가셨담...
투덜거리며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나가서 어머니를 찾았다.
내가 어머니를 발견했을땐 그 곳에는 일기를 불태우고 있는 그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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