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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5/11/24 03:21:57 |
Name | 눈부심 |
Subject | 영화를 매개로 한 social engineering |
제가 [Jessica Jones]를 너무 욕만 했는데... 마블의 새로운 탐정 및 영웅시리즈 [Jessica Jones]가 허접한 구석이 있지만 괄목할 만한 부분도 있어요. 영화 < Mad Max - Fury Road >가 나왔을 때 한국에선 '매드 맥스'가 유례없는 페미니스트영화임을 꿰뚫는 영화평은 제가 아직 못읽어 봤거든요.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에서 퓨리오사 역을 맡은 샤를리즈 테론은 상당한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남자배우인 톰 하디조차도 대중으로 하여금 '고작 조연인거야?'라는 의문이 들게 할 정도로 싱겁게 만들어 버려요. 비록 한쪽 팔이 성치 않은 역할로 나오지만 세기의 미인인 샤를리즈 테론은 남자들이 판 치는 영웅영화에서 열연한 여배우가 아닌, 기차게 멋진 액션영화를 주도한 '배우'로서 빛날 뿐이었어요. 이걸 두고 어떤 미국인은 social engineering이라고 평을 했어요. 그동안의 엔터테인먼트사업의 방향 덕분에 헐리우드영화계나 영화 속의 불평등한 남녀위치, 주로 남성의 유희에 촛점이 맞춰진 성적 장치라든지 남녀에 대한 통속적이고 진부한 고정관념의 옷을 대중은 입고 있지만, 이미 우리에게 오랫동안 맞춰진 옷이고 대부분 수동적으로 반응할 뿐인 대중의 느리고 굼뜬 속성은 굳이 그 옷을 바꿀의지가 없어요. 이 굼뜸을 수정하는 영화 속 변화가 social engineering인 거예요. 영화 속 내러티브는 그대로 두되 등장인물의 성과 인종을 획기적으로 바꾸어놓고 내러티브와의 일체를 꾀한 뒤 대중의 머리에 냅다 꽂아버리는 social engineering의 신선함은 상당히 크고 그 영향력도 무시하기 힘들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Jessica Jones]를 보며 느낀 거예요. 여성이 주도하는 일이 드문 영웅영화에서 제시카는 일단 주인공이며 여성이에요. 그녀가 폭발할 듯 성욕을 느끼는 대상은 흑백혼혈도 아닌, 피부색이 놀랍도록 까만 근육질의 흑인남성이에요. 이런 커플셋업은 드라마를 소비하는 대부분이 백인이며 그 중 반이 남성인 미국시장에서 상당한 도발일 거예요. 보통 헐리우드영화에서 의무감에 끼어 넣어준 것 같은 흑인역할을 대중은 자애롭게 수용하죠. 때로는 그런 동정적인 캐스트에 냉소를 보이기도 해요. < 제시카 존즈 >는 아예 흑인과 여성소비자가 다수인 다른 우주의 시장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조연부터 엑스트라까지 흑인등장인물이 시시때때로 자주 나와요. 그리고 꽤 비중있는 역할들 대부분이 여성이에요. 비서와 내연관계에 있는 로펌의 태풍은 의사를 아내로 두고 있는 레즈비언 CEO예요. 드라마 각본 자체는 혁명적이랄 것 없는 보통의 시나리오예요.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끄는 주인공, 대형로펌을 운영하는 법조계의 신, 주연이 줄곧 뜨거운 정사를 꿈꾸는 이, 주연에게 최고의 내조가 되는 친구 등과 같은 등장인물들은 기존을 답습하는 특이할 것 없는 구성이지만 여기에 여성과 흑인코드를 사시미칼로 요리하듯 능수능란하게 조리해 놓고 대중들이 시식하게 만들어 놓은 거죠. 여주 제시카의 둘도 없는 친구는 잘나가는 라디오쇼 진행자이며 역시 여성인데 이 여성 또한 남자친구와 섹스를 함에 있어서 여성상위를 격렬하게 즐겨요(이것도 장치가 아닐까 저 나름대로 분석;;) 이렇게 대놓고 도발적이지만 시리즈 특성 상 내러티브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는 대중은 모니터를 붙잡고 계속 시청을 하게 될 거예요. 상품광고가 우리 의식에 잠식해 와 친숙해지고 구매력을 창출시키듯 영화 속 social engineering 장치를 거듭 시청하는 대중 또한 새로운 옷에 점점 그들의 몸을 맞춰갈 지도 모를 일이에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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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드맥스>에서 드러난 페미니즘에 대해 조명한 리뷰들을 소개해보자면...
대표적으로는 듀나의 리뷰가 있겠네요. http://www.djuna.kr/xe/review/12401688
...페미니즘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되었죠. 영화가 쇠고기도 아니고, 이 작품이 페미니즘을 몇 등급까지 구현하고 있는가를 따질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이 영화가 의식적으로 페미니즘 주제를 탐구하고 있고 그 [탐구가 시리즈 안에서 논리적... 더 보기
대표적으로는 듀나의 리뷰가 있겠네요. http://www.djuna.kr/xe/review/12401688
...페미니즘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되었죠. 영화가 쇠고기도 아니고, 이 작품이 페미니즘을 몇 등급까지 구현하고 있는가를 따질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이 영화가 의식적으로 페미니즘 주제를 탐구하고 있고 그 [탐구가 시리즈 안에서 논리적... 더 보기
<매드맥스>에서 드러난 페미니즘에 대해 조명한 리뷰들을 소개해보자면...
대표적으로는 듀나의 리뷰가 있겠네요. http://www.djuna.kr/xe/review/12401688
...페미니즘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되었죠. 영화가 쇠고기도 아니고, 이 작품이 페미니즘을 몇 등급까지 구현하고 있는가를 따질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이 영화가 의식적으로 페미니즘 주제를 탐구하고 있고 그 [탐구가 시리즈 안에서 논리적인 동시에 발전적]이라는 것은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존 시리즈에서 성폭력이라는 소재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떠올려보시죠. 애들 나오는 3편은 없지만 1편과 2편에는 각각 하나씩 나오는데, 모두 당시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혹하기 짝이 없습니다. 1편에서 달아나는 남성 희생자는 놀림감이고 2편에서 강간살해당하는 여성을 그리는 태도는 사자에게 죽임 당하는 영양을 바라보는 것처럼 냉담하기 짝이 없죠. 다시 말해 [기존 시리즈는 성폭행을 <매드 맥스> 세계가 품은 야만성의 일부로만 보고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30년 뒤에 나온 영화는 이 태도를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이 영화에는 관객들을 자극하기 위한 성폭행 묘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성폭행이 조직적으로 행해지는지를 설명하고 피해자에게 적극 감정 이입하면서 이것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죠. 지금까지 사막에 묻혀있던 주제가 30년만의 폭우라도 맞은 것처럼 활짝 피어난 것입니다.
여성 캐릭터의 발전도 보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에서 강인한 여성은 드물지 않아요. <매드 맥스>에만 해도 버지니아 헤이가 연기한 여전사나 티나 터너가 연기한 \'아주머니\' 캐릭터가 있었죠. 하지만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처럼 여성 캐릭터들을 전면에 세우고 이들에게 다양성과 입체적인 관계묘사를 부여한 영화는 드물죠. 퓨리오사나 신부들은 선례를 들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부발리니 할머니들을 보고도 같은 이야기를 하긴 어렵지 않습니까?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페미니즘 논쟁에서 우리가 진짜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건 이 영화의 \'페미니즘 등급\'이 아닙니다. 조지 밀러가 어떤 종류의 자기 검열 없이 이런 직설적인 이야기를 통쾌하게 할 수 있었던 건 그가 \'늙은 백인 이성애자 남자\'의 특권을 누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죠. 물론 이런 식으로 자기 특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영감님이야 대환영이지만.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693951.html
...이상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맥스를 남성의 대표로, 퓨리오사를 여성의 대표로만 본다. 하지만 <매드 맥스> 시리즈의 전체 성격을 보면 그런 식의 읽기는 부족하다. 오히려 고전적인 서부극의 공식이 더 잘 맞는다. 맥스는 수적 열세인 상황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떠돌이 총잡이다. 퓨리오사는 그 이후에도 남아 사회를 이끌어야 하는 잠재적인 지도자다. 시타델의 점령은 맥스가 말할 때와 퓨리오사가 말할 때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진짜 주의 깊게 봐야할 부분도 두 의미의 차이, 그리고 그 낙차에서 발생하는 내적 드라마이지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성이 아니다.]
영화를 보고 비평하면서 영화의 모든 요소들을 다 분석할 수도 없다. 내가 이 영화를 특정한 시선으로 본다고 해서 그걸 무조건 강요해야 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의 페미니즘 논쟁에 참여한 사람들 상당수가 페미니즘 영화를 일대일 상징으로만 이루어진 지루한 영역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여 심히 걱정스럽다는 말은 해야겠다. 적어도 내가 전에 체크했을 때 이 세계는 훨씬 역동적이고 다양한 곳이었다. [쉽게 분류될 수 없는 입체적이고 불완전한 여성들이 쉽게 분류될 수 없는 입체적이고 불완전한 행위를 한다는 것 자체는 이 영화의 페미니즘 자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외에 김민하의 리뷰도 거론해볼 법 하겠습니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8546
....매드맥스가 보여주는 것은 가부장이 ‘정조대’와 ‘엄마의 우유’를 통해 독점한 모성을 여성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빼앗아 오는 것으로 피지배계급 간의 연대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여성해방에 다다르는 하나의 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임모탄 조가 모든 자동차인 ‘기가호스’의 뒷면에는 붉은 색과 검은 색의 깃발이 매달려있다. 임모탄 조의 시체를 기가호스의 위에 싣고 개선해 돌아오는 퓨리오사 일행의 모습은 시타델을 해방시키러 온 영락없는 혁명군이다. ‘엄마의 우유’를 생산하던 여성들이 직접 레버를 조작해 피지배 대중에게 물을 공급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는 여성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직관적으로 알게 된다. 모성을 짓밟는 방식으로 생산된 ‘엄마의 우유’에 맥스는 ‘적’의 피를 닦았다. 즉, 매드맥스의 플롯에서 우리는 여성해방의 과제가 좌파정치의 부차적 문제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해결에 착수해야 할 시급한 것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매드맥스는 ‘페미니즘 영화’로 불릴 자격이 있다.
이택광도 부분적으로는 이 주제를 다루었더군요.
http://fabella.kr/xe/blog1/1463
....퓨리오사는 임모탄의 국가에 속하지만 그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과잉이다. 그는 납치되어온 ‘이방인’이었지만, ‘전쟁기계’를 모는 사령관의 지위까지 올라간 ‘여성’이다. 상실된 그의 팔은 이 과정에서 만들어졌을 퓨리오사의 정체성을 상징하지만, 또한 그렇기에 그는 ‘재생산’으로 표상되는 임모탄의 아내들과 다른 존재이다. 절단된 그의 팔은 ‘사령관’이라는 남성의 기표를 위해 잘려나간, 허락받지 못하고 금지된 여성의 욕망, 다시 말해서 그로 하여금 ‘어머니의 땅’을 찾아 떠나게 만드는 그 분노의 원천이다.
다음은 강유정의 리뷰입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5312036415&code=990100
...결국, 믿음이 문제이다. 대개 여성들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가 전해준 신화와 동화를 듣고 자란다. 세상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은 순진한 믿음의 서사가 곧 여성적 행복의 길을 약속한다고 말해준다. 여자들은 그래서 길을 내는 게 아니라 나 있는 길을 따라가도록 성장한다. 길을 내는 건, 위험한 여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하지만, 결국 길은 내 발로 내야만 한다. 믿을 수 있는 것 역시 내가 지금껏 걸어오면서 만들어 놓은 길이다. 퓨리오사가 강인하기는 하지만 남자들만큼 힘이 센 것은 아니다. 그녀가 강인한 이유는 바로 자신을 믿기 때문이다. 도착적 지도자인 임모탄의 거짓 희망을 믿지 않고, 한때 그녀가 살았던 푸른 땅의 기억을 믿는 것, 순진한 믿음이 소녀를 잠재울 수는 있지만 여자를 구원할 수는 없다.
아마 본문의 문제의식과 가장 잘 맞는 것은 김숙현의 리뷰가 아닐까 싶네요. 이건 발췌하기에는 관련된 부분이 너무 길어서 링크만 겁니다.
http://fabella.kr/xe/blog3/1503
대표적으로는 듀나의 리뷰가 있겠네요. http://www.djuna.kr/xe/review/12401688
...페미니즘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되었죠. 영화가 쇠고기도 아니고, 이 작품이 페미니즘을 몇 등급까지 구현하고 있는가를 따질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이 영화가 의식적으로 페미니즘 주제를 탐구하고 있고 그 [탐구가 시리즈 안에서 논리적인 동시에 발전적]이라는 것은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존 시리즈에서 성폭력이라는 소재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떠올려보시죠. 애들 나오는 3편은 없지만 1편과 2편에는 각각 하나씩 나오는데, 모두 당시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혹하기 짝이 없습니다. 1편에서 달아나는 남성 희생자는 놀림감이고 2편에서 강간살해당하는 여성을 그리는 태도는 사자에게 죽임 당하는 영양을 바라보는 것처럼 냉담하기 짝이 없죠. 다시 말해 [기존 시리즈는 성폭행을 <매드 맥스> 세계가 품은 야만성의 일부로만 보고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30년 뒤에 나온 영화는 이 태도를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이 영화에는 관객들을 자극하기 위한 성폭행 묘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성폭행이 조직적으로 행해지는지를 설명하고 피해자에게 적극 감정 이입하면서 이것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죠. 지금까지 사막에 묻혀있던 주제가 30년만의 폭우라도 맞은 것처럼 활짝 피어난 것입니다.
여성 캐릭터의 발전도 보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에서 강인한 여성은 드물지 않아요. <매드 맥스>에만 해도 버지니아 헤이가 연기한 여전사나 티나 터너가 연기한 \'아주머니\' 캐릭터가 있었죠. 하지만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처럼 여성 캐릭터들을 전면에 세우고 이들에게 다양성과 입체적인 관계묘사를 부여한 영화는 드물죠. 퓨리오사나 신부들은 선례를 들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부발리니 할머니들을 보고도 같은 이야기를 하긴 어렵지 않습니까?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페미니즘 논쟁에서 우리가 진짜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건 이 영화의 \'페미니즘 등급\'이 아닙니다. 조지 밀러가 어떤 종류의 자기 검열 없이 이런 직설적인 이야기를 통쾌하게 할 수 있었던 건 그가 \'늙은 백인 이성애자 남자\'의 특권을 누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죠. 물론 이런 식으로 자기 특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영감님이야 대환영이지만.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693951.html
...이상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맥스를 남성의 대표로, 퓨리오사를 여성의 대표로만 본다. 하지만 <매드 맥스> 시리즈의 전체 성격을 보면 그런 식의 읽기는 부족하다. 오히려 고전적인 서부극의 공식이 더 잘 맞는다. 맥스는 수적 열세인 상황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떠돌이 총잡이다. 퓨리오사는 그 이후에도 남아 사회를 이끌어야 하는 잠재적인 지도자다. 시타델의 점령은 맥스가 말할 때와 퓨리오사가 말할 때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진짜 주의 깊게 봐야할 부분도 두 의미의 차이, 그리고 그 낙차에서 발생하는 내적 드라마이지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성이 아니다.]
영화를 보고 비평하면서 영화의 모든 요소들을 다 분석할 수도 없다. 내가 이 영화를 특정한 시선으로 본다고 해서 그걸 무조건 강요해야 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의 페미니즘 논쟁에 참여한 사람들 상당수가 페미니즘 영화를 일대일 상징으로만 이루어진 지루한 영역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여 심히 걱정스럽다는 말은 해야겠다. 적어도 내가 전에 체크했을 때 이 세계는 훨씬 역동적이고 다양한 곳이었다. [쉽게 분류될 수 없는 입체적이고 불완전한 여성들이 쉽게 분류될 수 없는 입체적이고 불완전한 행위를 한다는 것 자체는 이 영화의 페미니즘 자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외에 김민하의 리뷰도 거론해볼 법 하겠습니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8546
....매드맥스가 보여주는 것은 가부장이 ‘정조대’와 ‘엄마의 우유’를 통해 독점한 모성을 여성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빼앗아 오는 것으로 피지배계급 간의 연대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여성해방에 다다르는 하나의 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임모탄 조가 모든 자동차인 ‘기가호스’의 뒷면에는 붉은 색과 검은 색의 깃발이 매달려있다. 임모탄 조의 시체를 기가호스의 위에 싣고 개선해 돌아오는 퓨리오사 일행의 모습은 시타델을 해방시키러 온 영락없는 혁명군이다. ‘엄마의 우유’를 생산하던 여성들이 직접 레버를 조작해 피지배 대중에게 물을 공급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는 여성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직관적으로 알게 된다. 모성을 짓밟는 방식으로 생산된 ‘엄마의 우유’에 맥스는 ‘적’의 피를 닦았다. 즉, 매드맥스의 플롯에서 우리는 여성해방의 과제가 좌파정치의 부차적 문제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해결에 착수해야 할 시급한 것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매드맥스는 ‘페미니즘 영화’로 불릴 자격이 있다.
이택광도 부분적으로는 이 주제를 다루었더군요.
http://fabella.kr/xe/blog1/1463
....퓨리오사는 임모탄의 국가에 속하지만 그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과잉이다. 그는 납치되어온 ‘이방인’이었지만, ‘전쟁기계’를 모는 사령관의 지위까지 올라간 ‘여성’이다. 상실된 그의 팔은 이 과정에서 만들어졌을 퓨리오사의 정체성을 상징하지만, 또한 그렇기에 그는 ‘재생산’으로 표상되는 임모탄의 아내들과 다른 존재이다. 절단된 그의 팔은 ‘사령관’이라는 남성의 기표를 위해 잘려나간, 허락받지 못하고 금지된 여성의 욕망, 다시 말해서 그로 하여금 ‘어머니의 땅’을 찾아 떠나게 만드는 그 분노의 원천이다.
다음은 강유정의 리뷰입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5312036415&code=990100
...결국, 믿음이 문제이다. 대개 여성들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가 전해준 신화와 동화를 듣고 자란다. 세상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은 순진한 믿음의 서사가 곧 여성적 행복의 길을 약속한다고 말해준다. 여자들은 그래서 길을 내는 게 아니라 나 있는 길을 따라가도록 성장한다. 길을 내는 건, 위험한 여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하지만, 결국 길은 내 발로 내야만 한다. 믿을 수 있는 것 역시 내가 지금껏 걸어오면서 만들어 놓은 길이다. 퓨리오사가 강인하기는 하지만 남자들만큼 힘이 센 것은 아니다. 그녀가 강인한 이유는 바로 자신을 믿기 때문이다. 도착적 지도자인 임모탄의 거짓 희망을 믿지 않고, 한때 그녀가 살았던 푸른 땅의 기억을 믿는 것, 순진한 믿음이 소녀를 잠재울 수는 있지만 여자를 구원할 수는 없다.
아마 본문의 문제의식과 가장 잘 맞는 것은 김숙현의 리뷰가 아닐까 싶네요. 이건 발췌하기에는 관련된 부분이 너무 길어서 링크만 겁니다.
http://fabella.kr/xe/blog3/1503
전 첫번째 리뷰가 가장 마음에 들어요. 가장 알아듣기 쉬운 것 같아요. 지나친 은유와 철학적 해석, 의미부여 등은 제가 그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관계로;;
김숙현 씨의 리뷰는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흥미로와요. 남성들의 코드인 \'폭주족, 디젤펑크, 헤비메탈\' 이 세가지 요소가 영화 내내 시끄럽게 굉음을 내고 있음에도 여성들이 <매드 맥스-분노의 질주>에 열광하는 이유에 집중한 건 저도 덩달아 굉장히 재밌었어요. 단, 김숙현 씨가 여성등장인물 스플렌디드에 지도자 이미지를 투영한 건 퓨리오사를 걸출한 \'... 더 보기
김숙현 씨의 리뷰는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흥미로와요. 남성들의 코드인 \'폭주족, 디젤펑크, 헤비메탈\' 이 세가지 요소가 영화 내내 시끄럽게 굉음을 내고 있음에도 여성들이 <매드 맥스-분노의 질주>에 열광하는 이유에 집중한 건 저도 덩달아 굉장히 재밌었어요. 단, 김숙현 씨가 여성등장인물 스플렌디드에 지도자 이미지를 투영한 건 퓨리오사를 걸출한 \'... 더 보기
전 첫번째 리뷰가 가장 마음에 들어요. 가장 알아듣기 쉬운 것 같아요. 지나친 은유와 철학적 해석, 의미부여 등은 제가 그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관계로;;
김숙현 씨의 리뷰는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흥미로와요. 남성들의 코드인 \'폭주족, 디젤펑크, 헤비메탈\' 이 세가지 요소가 영화 내내 시끄럽게 굉음을 내고 있음에도 여성들이 <매드 맥스-분노의 질주>에 열광하는 이유에 집중한 건 저도 덩달아 굉장히 재밌었어요. 단, 김숙현 씨가 여성등장인물 스플렌디드에 지도자 이미지를 투영한 건 퓨리오사를 걸출한 \'조력자\'로 정의하고 나니 시원하게 페미니즘을 관철시키지 못했단 생각에 무리수를 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지나침이 있는 것 같아요.
\'폭주족, 디젤펑크, 헤비메탈\'이라는 남성적인 코드가 영화 전반에 걸쳐 귓가에서 웅웅대는 이 영화가 여성들에게 인기있는 이유는 바로 영화에서 보스가 여성이기 때문이에요. 영웅영화라고 해서 퓨리오사라는 인물 자체가 유독 남성성을 띤 여성도 아녜요. 여성성을 완전히 버린 여성도 아니에요. 가슴골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거나 예쁜 속눈썹을 반짝이고 있지는 않지만 세상이 종말의 위기 앞에 선 상황에서 문명이 바스라지기 전의 시대에 살던 여성보다 정신력이 조금 더 강하고 냉철하고 꾸밀 시간이 없을 뿐 퓨리오사도 여성이죠.
남녀 모두가 추구하는 가치에 부합하면서 여성성에 속한다고 칭찬받는 특징 중 한 가지가 협력자로서의 가치예요. 의사를 거드는 조력자로서의 간호사, 아이들에게 사회성을 교육하는 양육조력자로서의 교사 등은 주로 여성적인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죠. 이런 특징은 사회를 주도하는 기득권층의 전공은 아니에요. 따라서 기득권을 뚫고 들어가기에는 적절한 성정은 아니지만 인류 발전을 위해선 아주 중요한 핵심가치기도 해요. 협력은 남성여성을 떠나 평화의 구호죠. 남녀가 동등한 사회를 만들고 싶은 페미니즘이 남성의 폭력적인 마초성에 대항해 싸우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협력자로 대변되는 여성성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남자든 여자든 협력자들이 기득권층이 되면 그건 좋은 거잖아요. 퓨리오사는 영화 내내 톰 하디를 압도하는 주연급이었으면서 동등한 협력자이고 영화말미에서는 세뇌된 소년들과 양육기계로 착취당하는 여성들을 구원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인류 최고의 조력자예요. 해석의 자유를 누리자면 그렇다는 것이고 저는 감독이 조력적인 여성성을 퓨리오사를 통해 나타내고 싶었다고 당연 믿지 않아요. 그치만 그 결과가 평화라면 문제될 것이 없어요. 어쨌든 결국 퓨리오사가 영화말미엔 사망하기까지 했으면서 영화를 압도적으로 이끈 여성보스란 건 같은 여성들에게 대단한 희열을 주는 것 같아요.
같은 성이라는 동질성이 주는 유대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큰 것 같아요. 제가 어떤 생각을 했냐면요 \'폭주족, 디젤펑크, 헤비메탈\'이 남성편향적 취향인 건 거기에 남성이 있기 때문에 남자들이 더 열광하는 것이지 \'폭주족, 디젤펑크, 헤비메탈\'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이에 반감을 표하실 분들이 많이 계시겠지만 여성관객들이 영화 전반에 걸쳐 \'엔진덩어리, 폭주족, 디젤펑크, 헤비메탈\'로 쿵쾅쿵쾅대는 영화에 열광하는 건 그 영화를 이끄는 주인공이 여성이라고 하는 순전히 단순한 이유를 짚어보면 약간은 설득력이 있어요. 킁.
김숙현 씨의 리뷰는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흥미로와요. 남성들의 코드인 \'폭주족, 디젤펑크, 헤비메탈\' 이 세가지 요소가 영화 내내 시끄럽게 굉음을 내고 있음에도 여성들이 <매드 맥스-분노의 질주>에 열광하는 이유에 집중한 건 저도 덩달아 굉장히 재밌었어요. 단, 김숙현 씨가 여성등장인물 스플렌디드에 지도자 이미지를 투영한 건 퓨리오사를 걸출한 \'조력자\'로 정의하고 나니 시원하게 페미니즘을 관철시키지 못했단 생각에 무리수를 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지나침이 있는 것 같아요.
\'폭주족, 디젤펑크, 헤비메탈\'이라는 남성적인 코드가 영화 전반에 걸쳐 귓가에서 웅웅대는 이 영화가 여성들에게 인기있는 이유는 바로 영화에서 보스가 여성이기 때문이에요. 영웅영화라고 해서 퓨리오사라는 인물 자체가 유독 남성성을 띤 여성도 아녜요. 여성성을 완전히 버린 여성도 아니에요. 가슴골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거나 예쁜 속눈썹을 반짝이고 있지는 않지만 세상이 종말의 위기 앞에 선 상황에서 문명이 바스라지기 전의 시대에 살던 여성보다 정신력이 조금 더 강하고 냉철하고 꾸밀 시간이 없을 뿐 퓨리오사도 여성이죠.
남녀 모두가 추구하는 가치에 부합하면서 여성성에 속한다고 칭찬받는 특징 중 한 가지가 협력자로서의 가치예요. 의사를 거드는 조력자로서의 간호사, 아이들에게 사회성을 교육하는 양육조력자로서의 교사 등은 주로 여성적인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죠. 이런 특징은 사회를 주도하는 기득권층의 전공은 아니에요. 따라서 기득권을 뚫고 들어가기에는 적절한 성정은 아니지만 인류 발전을 위해선 아주 중요한 핵심가치기도 해요. 협력은 남성여성을 떠나 평화의 구호죠. 남녀가 동등한 사회를 만들고 싶은 페미니즘이 남성의 폭력적인 마초성에 대항해 싸우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협력자로 대변되는 여성성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남자든 여자든 협력자들이 기득권층이 되면 그건 좋은 거잖아요. 퓨리오사는 영화 내내 톰 하디를 압도하는 주연급이었으면서 동등한 협력자이고 영화말미에서는 세뇌된 소년들과 양육기계로 착취당하는 여성들을 구원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인류 최고의 조력자예요. 해석의 자유를 누리자면 그렇다는 것이고 저는 감독이 조력적인 여성성을 퓨리오사를 통해 나타내고 싶었다고 당연 믿지 않아요. 그치만 그 결과가 평화라면 문제될 것이 없어요. 어쨌든 결국 퓨리오사가 영화말미엔 사망하기까지 했으면서 영화를 압도적으로 이끈 여성보스란 건 같은 여성들에게 대단한 희열을 주는 것 같아요.
같은 성이라는 동질성이 주는 유대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큰 것 같아요. 제가 어떤 생각을 했냐면요 \'폭주족, 디젤펑크, 헤비메탈\'이 남성편향적 취향인 건 거기에 남성이 있기 때문에 남자들이 더 열광하는 것이지 \'폭주족, 디젤펑크, 헤비메탈\'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이에 반감을 표하실 분들이 많이 계시겠지만 여성관객들이 영화 전반에 걸쳐 \'엔진덩어리, 폭주족, 디젤펑크, 헤비메탈\'로 쿵쾅쿵쾅대는 영화에 열광하는 건 그 영화를 이끄는 주인공이 여성이라고 하는 순전히 단순한 이유를 짚어보면 약간은 설득력이 있어요. 킁.
곁가지 이야기긴 합니다만 관심있는 주제라서 언급해보자면, 다행히도(?) 헤비메탈이 금녀의 구역만은 아니기는 합니다. 여성 소비자도 비주류기는 하지만 적잖이 있고(특히 헤비메탈이 매니악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 북동유럽 쪽은 더더욱), 여성 보컬들도 많이 있지요. 다만 이들 대부분이 \'곱디고운 목소리와 외모를 발판으로 곡에 판타지적인 감성을 불어넣는\', 남성들을 위한 여성 상품으로서 소비되고 있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물론 angela gossow 같은 예외도 있습니다(현재는 잠정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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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가지 이야기긴 합니다만 관심있는 주제라서 언급해보자면, 다행히도(?) 헤비메탈이 금녀의 구역만은 아니기는 합니다. 여성 소비자도 비주류기는 하지만 적잖이 있고(특히 헤비메탈이 매니악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 북동유럽 쪽은 더더욱), 여성 보컬들도 많이 있지요. 다만 이들 대부분이 \'곱디고운 목소리와 외모를 발판으로 곡에 판타지적인 감성을 불어넣는\', 남성들을 위한 여성 상품으로서 소비되고 있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물론 angela gossow 같은 예외도 있습니다(현재는 잠정 은퇴).
https://www.youtube.com/watch?v=XCOWv0H9Z-E
https://www.youtube.com/watch?v=8r71Pp_LwnA
처음 듣는 사람의 경우에는 목소리만으로 성별을 분간하기가 쉽지 않은 케이스...물론 이조차도 과연 성정치적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느냐하면 그건 아니겠지만요. 여성 보컬은 많아도 기타리스트나 베이시스트나 드러머는 드물기도 하고요.
https://www.youtube.com/watch?v=XCOWv0H9Z-E
Arch Enemy - Silverwing [日本語歌詞・和訳] Live Japan Lyrics HD1080p
https://www.youtube.com/watch?v=8r71Pp_LwnA
Arch Enemy - Bury Me an Angel Live in London 2004 (Angela Gossow Cam)
처음 듣는 사람의 경우에는 목소리만으로 성별을 분간하기가 쉽지 않은 케이스...물론 이조차도 과연 성정치적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느냐하면 그건 아니겠지만요. 여성 보컬은 많아도 기타리스트나 베이시스트나 드러머는 드물기도 하고요.
그리고 위의 리플과는 별개로 예술/대중 매체에서의 성/인종 역할이나 소수자, 정체성 문제에 대한 생각을 늘어놓아보자면...
성이나 인종 역할의 전복 그 자체만으로는 인습과 통념과 고정관념의 파괴에 있어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클리셰들이 표준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음을 반증하죠. 예컨대, <내부자들>처럼 여성 캐릭터의 비중이 거의 없고 남성들의 노리개로만 쓰이는 작품은 당연히 성정치의 관점에서 문제점이 많지요.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미녀 삼총사>처럼 여성들이 중심 인... 더 보기
성이나 인종 역할의 전복 그 자체만으로는 인습과 통념과 고정관념의 파괴에 있어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클리셰들이 표준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음을 반증하죠. 예컨대, <내부자들>처럼 여성 캐릭터의 비중이 거의 없고 남성들의 노리개로만 쓰이는 작품은 당연히 성정치의 관점에서 문제점이 많지요.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미녀 삼총사>처럼 여성들이 중심 인... 더 보기
그리고 위의 리플과는 별개로 예술/대중 매체에서의 성/인종 역할이나 소수자, 정체성 문제에 대한 생각을 늘어놓아보자면...
성이나 인종 역할의 전복 그 자체만으로는 인습과 통념과 고정관념의 파괴에 있어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클리셰들이 표준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음을 반증하죠. 예컨대, <내부자들>처럼 여성 캐릭터의 비중이 거의 없고 남성들의 노리개로만 쓰이는 작품은 당연히 성정치의 관점에서 문제점이 많지요.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미녀 삼총사>처럼 여성들이 중심 인물로 전면에 나선다고 해서 여성적인 영화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저 섹시한 여성을 내세워 남성들의 판타지를 만족시키는 데에 목표를 두고 있으니까요. 여신숭배나 여걸예찬이나 여전사 모에, 누나 최고!와 같은 것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세상천지 어느 곳에서나 이어져온 남성들의 습성이지요. 남성 소비자라는 남성 주체에 대해 여성을 대상화시키고 성상품화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당연히 들어올 것입니다. 혹은 여성과 남성의 비율을 적당히 분배하든, 퀴어를 끼워넣든 마찬가지 문제에 봉착합니다. 이런 설정은 결국 전통적인 남성중심적 관점을 의식한 판단임을 부정할 수 없으니까요. 이렇듯, 어떤 식으로 클리셰를 회피한다고 한들 역설적으로 클리셰의 존재를 광고하게 되어버린다는 한계가 있지요.
이쯤 되면 그 어떤 선택을 해도 남성 중심적인 사회의 구조와 시스템 하에서는 성정치적으로 올바를 수 없으며 남성 중심성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과 관점은 없다는 메타적인 입장까지 등장하게 되겠지요. 이에 대고 그러한 관점 역시 성정치적 회의주의를 조장하는 비겁함이라고 비판하는 입장도 있을 수 있겠고.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건을 두고 즐겨 쓰는 비유인데, 마치 이솝우화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과 나귀의 이야기와 같은 상황이 펼쳐지겠지요. 아버지와 아들이 나귀를 타고 장에 가는데, 아버지가 나귀를 타도 욕을 먹고, 아들이 나귀를 타도 욕을 먹고, 둘 다 함께 타도 욕을 먹고, 둘이 함께 내려 걸어가도 욕을 먹고, 둘이 함께 나귀를 메고 가도 욕을 먹고, 그러다 결국 물에 빠지는 이야기 말이죠. 비슷한 상황이 인종이나 장애인이나 계급 이슈를 두고서도 벌어지곤 합니다. 그러면서 차라리 처음부터 PC를 쌩까느니만 못한, 'PC 의식 과잉의 덫'이 부메랑으로 돌아오죠.
또한, 이런 식의 클리셰 비틀기는 관객과 팬덤이 그 자체에 도취되어 작품을 과몰입하고 과대평가하기 쉽게 만든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가령 수준 이하의 소설이나 영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매체를 두고서, 여성이나 인종이나 소수자의 역할이 전통적인 클리셰를 답습하지 않고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이유에 집착하며 작품의 혁신성을 과대평가하는 이는 쉬 찾아볼 수 있는 것이지요(그나마도 아주 얄팍해서 표면적으로만 클리셰를 우회하고 실제로는 클리셰 그 자체인 수준일 경우가 많지요). 예컨대 <아이마스>에서 페미니즘을 읽어내며 애써 의미부여하는 눈 먼 팬이라든가 -_-; 이런 치기어린 팬들은 곧잘 정당한 비평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풍토를 만들어버리며 해악을 끼치죠.
물론 <매드 맥스> 같은 경우는 그런 논란을 제법 불식시킨 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퓨리오사의 힘만으로 가능하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말씀드렸듯이, 여전사 캐릭터는 궁극적으로는 남성들을 위한 팬시 상품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경우가 흔하죠. 물론 퓨리오사는 위에서 이야기한 여전사들처럼 섹슈얼하게 소비되진 않았습니다. 그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감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성적 매력이 부각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녀에게서 부각된 것은 성적으로 중립적인 능력과 기능 뿐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묘사가 오히려 반대로 성정치적 불건전성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스킨헤드에, 화장도 제대로 안 했으며, 우락부락한, 신체적 장애가 있는 여성에게 끌림을 느낄 남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올바르지 못한 불쾌한 진실이니까요(물론 퓨리오사와 별개로 샤를리즈 테론은 매력적인 미모의 여성이지만요). 이쯤 되면 여성 캐릭터가 남성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상품이 아닌, 내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주체이자 주인공으로서 우뚝 서기 위해서는 성적매력들을 사상시키면서 무성적이고 성중립적인 존재로 만들어야만 하느냐,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여성주의적으로 올바른 방향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식의 의문이 누구에게나 금방 들 것입니다. 이렇게 성정치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전혀 없지만은 않은 퓨리오사의 난점을 해결해주는 것은, 태중에 [생명]을 품고서 [생명수]로 몸을 씻고 목을 축이는 임모탄의 다섯 아내 - 하지만 이들은 반대로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섹스 어필로부터 자유롭지 않죠 - 와 부발리니 할매 전사들, 그리고 이들이 여성이라는 공통점으로 연결되면서 나오는 연대감과 앙상블과 조화이죠. 모두가 퓨리오사를 여성으로서 인지하기는 하지만, 만약 퓨리오사만 단독으로 떨어뜨린 작품이었다면 아마 퓨리오사의 여성성은 배제되고 망실되어 여성주의적으로 고찰해볼 여지가 별로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종래에 이런 캐릭터가 없었던 것도 아니기도 하고요. 스플렌디드를 위시한 임모탄의 아내들이나 할매 전사들도 마찬가지이고요. 하지만 그들이 모이니 그야말로 정의로워집니다.
이런 식으로 다양한 배경과 설정과 조건과 양상, 개성, 기억 등을 가지면서 관객에게 인간 군상과 서사의 입체성과 다양성을 느끼게 하지만, 한편으로 공통경험이나 정체성으로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어 일체감을 가지는 여러 소수자 유형을 등장시키고 병존시키고 연결시켜서, 다양한 방식으로 클리셰에 구멍을 내서 클리셰의 존재를 상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이나믹하고 현란한 작품을 만들어버리는 것이, 아마 현재로서는 정치적인 건전성을 획득하는 가장 정석적이고 현명한, Social engineering의 유일한 방법은 아닐까..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이 점에서 <매드맥스>의 의의는 작지 않겠지요.
성이나 인종 역할의 전복 그 자체만으로는 인습과 통념과 고정관념의 파괴에 있어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클리셰들이 표준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음을 반증하죠. 예컨대, <내부자들>처럼 여성 캐릭터의 비중이 거의 없고 남성들의 노리개로만 쓰이는 작품은 당연히 성정치의 관점에서 문제점이 많지요.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미녀 삼총사>처럼 여성들이 중심 인물로 전면에 나선다고 해서 여성적인 영화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저 섹시한 여성을 내세워 남성들의 판타지를 만족시키는 데에 목표를 두고 있으니까요. 여신숭배나 여걸예찬이나 여전사 모에, 누나 최고!와 같은 것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세상천지 어느 곳에서나 이어져온 남성들의 습성이지요. 남성 소비자라는 남성 주체에 대해 여성을 대상화시키고 성상품화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당연히 들어올 것입니다. 혹은 여성과 남성의 비율을 적당히 분배하든, 퀴어를 끼워넣든 마찬가지 문제에 봉착합니다. 이런 설정은 결국 전통적인 남성중심적 관점을 의식한 판단임을 부정할 수 없으니까요. 이렇듯, 어떤 식으로 클리셰를 회피한다고 한들 역설적으로 클리셰의 존재를 광고하게 되어버린다는 한계가 있지요.
이쯤 되면 그 어떤 선택을 해도 남성 중심적인 사회의 구조와 시스템 하에서는 성정치적으로 올바를 수 없으며 남성 중심성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과 관점은 없다는 메타적인 입장까지 등장하게 되겠지요. 이에 대고 그러한 관점 역시 성정치적 회의주의를 조장하는 비겁함이라고 비판하는 입장도 있을 수 있겠고.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건을 두고 즐겨 쓰는 비유인데, 마치 이솝우화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과 나귀의 이야기와 같은 상황이 펼쳐지겠지요. 아버지와 아들이 나귀를 타고 장에 가는데, 아버지가 나귀를 타도 욕을 먹고, 아들이 나귀를 타도 욕을 먹고, 둘 다 함께 타도 욕을 먹고, 둘이 함께 내려 걸어가도 욕을 먹고, 둘이 함께 나귀를 메고 가도 욕을 먹고, 그러다 결국 물에 빠지는 이야기 말이죠. 비슷한 상황이 인종이나 장애인이나 계급 이슈를 두고서도 벌어지곤 합니다. 그러면서 차라리 처음부터 PC를 쌩까느니만 못한, 'PC 의식 과잉의 덫'이 부메랑으로 돌아오죠.
또한, 이런 식의 클리셰 비틀기는 관객과 팬덤이 그 자체에 도취되어 작품을 과몰입하고 과대평가하기 쉽게 만든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가령 수준 이하의 소설이나 영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매체를 두고서, 여성이나 인종이나 소수자의 역할이 전통적인 클리셰를 답습하지 않고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이유에 집착하며 작품의 혁신성을 과대평가하는 이는 쉬 찾아볼 수 있는 것이지요(그나마도 아주 얄팍해서 표면적으로만 클리셰를 우회하고 실제로는 클리셰 그 자체인 수준일 경우가 많지요). 예컨대 <아이마스>에서 페미니즘을 읽어내며 애써 의미부여하는 눈 먼 팬이라든가 -_-; 이런 치기어린 팬들은 곧잘 정당한 비평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풍토를 만들어버리며 해악을 끼치죠.
물론 <매드 맥스> 같은 경우는 그런 논란을 제법 불식시킨 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퓨리오사의 힘만으로 가능하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말씀드렸듯이, 여전사 캐릭터는 궁극적으로는 남성들을 위한 팬시 상품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경우가 흔하죠. 물론 퓨리오사는 위에서 이야기한 여전사들처럼 섹슈얼하게 소비되진 않았습니다. 그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감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성적 매력이 부각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녀에게서 부각된 것은 성적으로 중립적인 능력과 기능 뿐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묘사가 오히려 반대로 성정치적 불건전성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스킨헤드에, 화장도 제대로 안 했으며, 우락부락한, 신체적 장애가 있는 여성에게 끌림을 느낄 남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올바르지 못한 불쾌한 진실이니까요(물론 퓨리오사와 별개로 샤를리즈 테론은 매력적인 미모의 여성이지만요). 이쯤 되면 여성 캐릭터가 남성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상품이 아닌, 내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주체이자 주인공으로서 우뚝 서기 위해서는 성적매력들을 사상시키면서 무성적이고 성중립적인 존재로 만들어야만 하느냐,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여성주의적으로 올바른 방향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식의 의문이 누구에게나 금방 들 것입니다. 이렇게 성정치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전혀 없지만은 않은 퓨리오사의 난점을 해결해주는 것은, 태중에 [생명]을 품고서 [생명수]로 몸을 씻고 목을 축이는 임모탄의 다섯 아내 - 하지만 이들은 반대로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섹스 어필로부터 자유롭지 않죠 - 와 부발리니 할매 전사들, 그리고 이들이 여성이라는 공통점으로 연결되면서 나오는 연대감과 앙상블과 조화이죠. 모두가 퓨리오사를 여성으로서 인지하기는 하지만, 만약 퓨리오사만 단독으로 떨어뜨린 작품이었다면 아마 퓨리오사의 여성성은 배제되고 망실되어 여성주의적으로 고찰해볼 여지가 별로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종래에 이런 캐릭터가 없었던 것도 아니기도 하고요. 스플렌디드를 위시한 임모탄의 아내들이나 할매 전사들도 마찬가지이고요. 하지만 그들이 모이니 그야말로 정의로워집니다.
이런 식으로 다양한 배경과 설정과 조건과 양상, 개성, 기억 등을 가지면서 관객에게 인간 군상과 서사의 입체성과 다양성을 느끼게 하지만, 한편으로 공통경험이나 정체성으로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어 일체감을 가지는 여러 소수자 유형을 등장시키고 병존시키고 연결시켜서, 다양한 방식으로 클리셰에 구멍을 내서 클리셰의 존재를 상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이나믹하고 현란한 작품을 만들어버리는 것이, 아마 현재로서는 정치적인 건전성을 획득하는 가장 정석적이고 현명한, Social engineering의 유일한 방법은 아닐까..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이 점에서 <매드맥스>의 의의는 작지 않겠지요.
근데요 제가 <제시카 존즈>를 보면서 시치미를 떼고 대중의 뇌 속으로 시각적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방식이 상당히 효과가 크겠단 생각을 했어요. 무슨 말씀이냐면 지금까지 영화 속에서 영웅은 항상 남성백인, 머리가 비상한 \'천재\'악당도 백인, 주인공의 마음을 사로잡는 상대도 백인, 사건이 터졌을 때 비극의 희생자들은 백인중산층 아니면 꼭 \'가난한\' 흑인들이었어요. 가끔은 현실을 반영한다는 미명아래서요. 이건 꼭, 백인은 중범으로 수감 중인 죄수들 사이에서 흔하게 눈에 띄어선 안된다거나, 흑인은 영웅이 될 수 없다거나, ... 더 보기
근데요 제가 <제시카 존즈>를 보면서 시치미를 떼고 대중의 뇌 속으로 시각적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방식이 상당히 효과가 크겠단 생각을 했어요. 무슨 말씀이냐면 지금까지 영화 속에서 영웅은 항상 남성백인, 머리가 비상한 \'천재\'악당도 백인, 주인공의 마음을 사로잡는 상대도 백인, 사건이 터졌을 때 비극의 희생자들은 백인중산층 아니면 꼭 \'가난한\' 흑인들이었어요. 가끔은 현실을 반영한다는 미명아래서요. 이건 꼭, 백인은 중범으로 수감 중인 죄수들 사이에서 흔하게 눈에 띄어선 안된다거나, 흑인은 영웅이 될 수 없다거나, 흑인은 부유한 시민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코드를 심어놓는 건 아니지만 효과는 그에 못지 않아요. 제시카(백인여성)가 좋아하는 근사한 남성이 흑인, 영화에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상대역이나 주변역할로 등장하는 이들이 가난한 흑인이 아니고 상당수가 꽤 잘살기도 하거나 중산층이기도 하면서 결백한 흑인들, 즉 드라마에서 캐스팅의 무게감으로 보아 보통 백인이 등장할 법한 자리에 눈에 띄게 흑인들이 등장하는 이 드라마는 꽤 묘한 데가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에디 머피가 영화 <에디 머피의 구혼작전>에서 보여준 것처럼 아프리카인들의 정체성까지 뒤집어 놓으면서까지 흑백인물구도를 얼척없이 바꾸어 놓은 것도 아니에요. <제시카 존즈>에서의 등장인물의 인종과 사회적 지위는 PC세대임을 표방하는 밀레니얼들과 함께 사는 현대의 미국대중으로서 이것은 당위로 여겨야 한다고 받아들일 자세에 만족하는 수준으로 social engineering을 시도하고 있는 것 같아요. 쉽게 말해, 거부감이 안 들고 좀 신기하고 재밌어요.
그렇다고 해서 에디 머피가 영화 <에디 머피의 구혼작전>에서 보여준 것처럼 아프리카인들의 정체성까지 뒤집어 놓으면서까지 흑백인물구도를 얼척없이 바꾸어 놓은 것도 아니에요. <제시카 존즈>에서의 등장인물의 인종과 사회적 지위는 PC세대임을 표방하는 밀레니얼들과 함께 사는 현대의 미국대중으로서 이것은 당위로 여겨야 한다고 받아들일 자세에 만족하는 수준으로 social engineering을 시도하고 있는 것 같아요. 쉽게 말해, 거부감이 안 들고 좀 신기하고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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