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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3/11/16 18:54:56
Name   김비버
Subject   거칠고 인용 없이 쓰는 수능 단상
1.
지금은 그마저 시들해졌지만, 예전에 학벌주의가 한창 사회적 담론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학벌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라도 학벌을 취득해야 한다'.

2.
원래 서울대 로스쿨은 '어리고-성적 좋고-무색무취'한 학생을 좋아했는데, 이를 비판하면서 '공익'이라는 테마로 보다 다양한 학생을 선발하고자 노력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분위기를 주도했던 당시 원장님께서 입학식 날 하셨던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젊은 날 남들과 다른 길을 선택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거대한 존재가 되어 있다. 비록 난 전형적인 엘리트의 길을 걸었지만 여러분은 마음껏 도전해봤으면 좋겠다'(아마 엘리트인 자신은 아무리 뭘 해도 one of them인 반면에 자신의 길을 개척한 사람들은 그 자체로 세력이고 태풍의 핵이라는 인식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사실 서울대 법대 사람들의 오랜 인식이자 갈증이기도 하지요).

3.
변호사시험 제도는 총체적으로 불합리합니다. 작년에 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 시험을 반드시 붙어야 하는 이유를 두개만 꼽으라면, 그 두번째는 이 제도를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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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주류가 되어야만 체제를 비판할 자격이 생긴다는 것. 이 메시지는 청운의 '꿈'을 품은 명민한 젊은이들에게 강렬하게 다가오지만, 시스템적으로 보면 이야말로 엘리트주의를 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사회적 기제가 아닐까 합니다.

'능력주의'에 대해서는 정치적, 윤리적, 철학적으로 찬반 담론이 있을 수 있고 실제로도 첨예한 쟁점입니다만, '엘리트주의'에 대해서는 찬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엘리트주의는 해당 엘리트 집단이 인정한 능력만을 참된 '능력'으로 인정하는데, 대체로 엘리트 집단이 선호하는 능력이라는 것은 치밀하고 깔끔한 형식, 세련된 의전 그리고 완벽한 모방을 의미하는 반면(가끔 엘리트 집단에서 쿨타임 한번 찰때마다 버튼 눌린듯이 '창의성' 운운할 때가 있는데, 이는 케이크의 체리장식처럼 완벽한 모방을 기초로 하되 말미에 자신의 위트를 살짝 가미해보라는 의미입니다), 사회가 진정으로 원하는 능력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재화를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 그리고 더 오염 없이 생산하는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엘리트집단이 추구하는 가치와 사회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가치의 초점이 다르기 때문에, 엘리트주의가 장악한 사회는 전형적으로 어느 한 구석에서 엘리트들은 무지하게 고생하면서 인생 갈아넣고 있는데, 정작 사회는 나아지지 않는...그런 현상이 발생합니다. 다시 말해 헛고생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전근대사회의 사대부, 귀족들처럼요. 그리고 역사가 보여주지요, '귀족주의'는 언제나 위기상황에서 무력했다는 것을.

다시, 체제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주류가 되어라, 이 말이 강렬한 이유는 엘리트주의 즉 귀족주의는 항상 '전'과 '후'를 나누어서, 어떤 시험 내지는 기타 자격증명을 통과하여 '후'에 진입하면 그로써 모든 것이 바뀌고 그제서야 '진정한 엘리트'가 될 수 있는 것과 같은 환상을 속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체제는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습니다. 더욱 순수한 엘리트, '더 진정한 엘리트'가 되기 위한 자격증명은 끝이 없고 설령 이 모든 과정을 거친다고 하더라도 그 때에는 이미 자기 자신이 체제의 일부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거칠게 요약해서 자본주의가 성공했던 이유는, 시장논리와 시장의 평가 시스템이라는 무기로 엘리트 귀족들의 번지르르한 자체 평가 시스템을 무력화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현대에도(그리고 제 생각에는 한국은 더더욱) 엘리트들은 민주주의와 정부 예산, 그리고 정치적 명분에 기대어 어느 한구석에서 자기들만의 성을 쌓고 인정놀이를 하곤 합니다. 마치 서울대 로스쿨의 '공익' 담론처럼요.

지금의 수능은 어떻습니까? 때로 어떤 학생은 대학 어디 가는 것보다 확실한 기술을 배우든 서비스업에 투신하든 하여 돈벌이를 하는 것이 자기 자신한테도 좋고 사회에도 이롭다는 것을 본인도 내심 알고, 선생님도 알고, 학부모도 알지만, 막상 진로상담 시에는 아무도 그 얘기를 꺼내지 못하더군요. 이 사회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타인의 욕망'이 특정 종류 인간들에게 (그들이 산출하는 가치와 관계 없이) 문화적 중심성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리고 수능이라는 기제는 이를 강화, 정당화 하구요. 이 점에서 비판은 수능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수시, 입학사정관제 등 입시 전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즉 수능이라는 시험이 문제가 아니라 수능 등 대학입시에 부여되는 사회적, 문화적 의미가 문제라는 것이고, 그 사회적, 문화적 의미는 엘리트주의적 맥락에서 발생, 강화된다는 것입니다. 수능에 대한 비판으로 입학사정관제가 도입되었지만, 이는 평가의 주체를 평가원에서 (그야말로 엘리트주의에 쩌들어 있는) 교수들에게 이양한 것이기 때문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함은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능 날 수능을 비판하며 생각해야 하는 대안은 수능이라는 '시험'의 해체가 아니라 그 시험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의미의 해체, 즉 문화적 중심성의 정당한 배분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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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aaade
    흥미로운 관점이네요. 우리 사회는 수능이 강점하고 있는 문회적 중심성을 해체할 잔다르크를 만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대로 흘러가버리게 되는걸까요.
    김비버
    그런 문화 자원을 배분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처럼 좌든 우든 정치가 리더십을 잃은 상황이라면 불가능하지 않을까요?ㅠㅠㅋㅋ
    과학상자
    백날 대입제도 고쳐봐야 결국은 설대 의대 로스쿨 가야 사람대접 받는다는 집단의 환상이 깨지지 않으면 백날 똑같은 논란을 되풀이 하는 거지요. 정말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1
    하마소
    서열의 고착화 내지는 학력의 자본화...는 항상 생각해봐야 할 관점일테고, 더하여 떠오르는 건 과목 내지는 배점이 재편성되는 흐름 전반이 학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이겠지요. 어떠한 기준을 상승시키는가 라는 지점은 결국 어느 영역의 중요도를 권력화시키는가와 연결되곤 하니. 수리영역으로 대변되어온 수학이 점차 학사 권력의 중심을 구축해온 것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겠지요.
    1
    이게 근데… 저도 쨌든 울 엄마가 그런 길로 키워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고 그런 점에서 동질감도 있고 그런데… 늘 마음 한 구석에는 다 때려부수고 싶은 욕구가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아요. 저같은 경우에는 대학 진학 이후에 이과로 전향한 것도 그런 맥락이 있고 그러나 늘 나도 편입되고 싶다는 생각도 있고… 때려부수고 싶다는 생각과 일원이고 싶다는 생각을 둘 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는데 그게 참 어렵습니다. 문신 새기고 싶다 이런 생각도 그런 틀에 박힌 길에 대한 반동으로 드는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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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세제곱인생수정됨
    그래서 세상엔 위선이 필요합니다. 체제 기득권의 일부에 들어가 그놈의 '비판할 자격'(솔직히 그딴게 어딨음? 싶지만)을 얻어서 어렵게 비판하고 있는데 그걸 이른바 '위선', 이미 편입한 기득권 내에서 배불러서 속편하게 하는 비판이라고 하면 빡치지요. 힘빠지고.

    SKY 대 출신이 그래도 그 학교 애들의 비뚤어진 행태에 대해 비판하면 니가 그 학교들 출신이라 가능한거라고 뭐라하고 그 학교 출신이 아니면 컴플렉스라고 뭐라하면 그냥 다 닥치고 조용히 살라는 얘기일 뿐이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솔직함을 빙자해 자신이 맘편히 ... 더 보기
    그래서 세상엔 위선이 필요합니다. 체제 기득권의 일부에 들어가 그놈의 '비판할 자격'(솔직히 그딴게 어딨음? 싶지만)을 얻어서 어렵게 비판하고 있는데 그걸 이른바 '위선', 이미 편입한 기득권 내에서 배불러서 속편하게 하는 비판이라고 하면 빡치지요. 힘빠지고.

    SKY 대 출신이 그래도 그 학교 애들의 비뚤어진 행태에 대해 비판하면 니가 그 학교들 출신이라 가능한거라고 뭐라하고 그 학교 출신이 아니면 컴플렉스라고 뭐라하면 그냥 다 닥치고 조용히 살라는 얘기일 뿐이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솔직함을 빙자해 자신이 맘편히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감추는 위악을 시전할 뿐이죠. 위악보다 위선이 낫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앞선 댓글에서 정치가 문화적 자원을 배분하는 역할을 해야한다고 하셨는데 정치의 정의가 가치의 권위적 배분인 것은 맞으나 여기에서 가치는 주로 예산으로 나타나는 물리적인 형태라 문화 자체를 정치가 바꾸는 일은 쉽지 않고 바람직한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도주의자에 가까운 저는 제도가 문화를 바꾼다고 보는데 정치가 제도를 바꿀 순 있지만 그 제도가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를일이고 유권자들이 실패와 재도전을 통한 최적 제도 찾기를 기다려주지도 않을 거 같고요. 이건 저도 답을 모르겠네요.
    3
    동파육
    대개의 역사적인 제도들이 그러했듯이 제도가 고착화되면 모순이 심화되기 마련인데 그 모순이 임계점을 건드릴 즈음 경계에 선 이들이 나타나게됩니다. 그 경계에 있는 이들이 기존의 체계를 깨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는 시도가 실패하느냐 성공하느냐의 문제이지 장기적으로는 고착화된 질서는 언젠가는 깨지게 되어있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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