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2/03/07 23:41:20수정됨
Name   자몽에이드
Subject   모 중소병원 직장인의 일기
저는 서울소재의 약 150병상 가량의 규모를 갖춘 병원의 행정부서에서 근무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병원은 비교적 코로나 관리가 잘되는 편이였고 이번 오미크론 대유행도 우리는 스무스하게 비켜나갈 것이라고 모두가 믿고 있었습니다. 간혹 직원 한 두명이 코로나에 걸리긴 했으나 빠른 대처로 원내 사람들끼리(특히 입원환자들에게) 감염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약 3주전 병원 자체적으로 실시했던 신속항원검사에서 몇명의 직원과 몇명의 환자에게서 양성반응이 나오면서 제 직장생활에도 화마가 들이 닥쳤습니다. 갑자기 생긴 양성자의 관리에 기민하지 못했던 것인지, 이미 바이러스가 돌고 있던 시점이었던건지 1주도 안된 사이에 환자와 간병인들이 여기저기서 감염이 되기 시작했고 결국 한 층을 격리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방역물품 구입에 대한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모든 병원 특유의 보수적인 지출정책으로 인해 속으로 화가 엄청났습니다. 당장 사야 대비가 되는 것들이 결재라인을 타고 엿가락처럼 늘어져서는 질척거렸습니다.(결국 조금 더 후에는 안되겠는지 전결로 바뀌긴 했지만...)

격리환자가 생기면서 해야될 업무가 갑자기 많아졌습니다. D레벨 방역복에 부츠커버, 장갑, 고글, 페이스쉴드까지 완전 무장한 상태로 병실에 입장해야 되었고 배식을 따로 챙겨야 하고 온갖 생활용품이 의료폐기물로 버려지면서 업무의 과중이 늘어났습니다. 입어보신 분은 알겁니다. 2월의 추운 기온에도 방역복을 입고 일을 하면 땀이 납니다. 온몸을 밀봉했기에 폰을 꺼내어 다른 직원과 연락을 하거나 받을 수도 없고 고글과 페이스쉴드에는 호흡으로 인해 습기가 차서 앞이 잘 보이질 않습니다.

격리가 진행된 병동의 수간호사 선생님은 하루종일 물 몇모금 마신거 말고는 먹는 것도 없이 일하다가 양성이 되어 자택격리에 들어가고 다른 선생님들도 감염되기 시작하니 이제는 일할 인원이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해야 될 업무는 후순위로 밀리고 당장 닥친 일들을 처리하는데 하루가 다 가버렸습니다. 퇴근하고 집에와서 잠자리에 들 때면
"차라리 나도 내일 일어났을 때 양성이 되어서 그냥 쉬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근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도 전 멀쩡합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사투를 벌인지 1~2주가 지나면서 격리해제된 직원들이 다시 일터에 투입되고 양성환자들이 코로나 전담 병원으로 전원을 가면서 조금씩 복구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완전한 끝은 아닙니다. 의심환자들은 계속해서 나오고 있거든요.

아마 다른 의료넷 회원 분들은 더 심각한 상태의 병원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분명 계실겁니다.(실제로 엄청 심각한 사례의 병원 이야기도 몇군데 들어보니 저희는 브론즈티어 수준입니다...)
K방역 자랑하던 나라가 현재 세계 1위의 확진자수가 나오는 나라가 되었습니다.(인구대비로 보자면 진짜 ㄷㄷ)
현 상황에 비판은 쉽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나라꼴 잘 돌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겪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부분도 분명 존재합니다. 몇년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누군가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은 묵묵히 자기 위치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

PS - 원무과의 팀장 한분은 정말 헌신적이었습니다. 하루종일 일하고 밤 11시 12시에 퇴근할때까지도 양성환자들을 케어하고 상담해주고 폐기물을 치우고 전원관리를 했지만 싫은 내색 한번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렇게 오래 접촉하고 있는데 어떻게 멀쩡한거지 하는 생각을 계속 했습니다. 마치 선지자, 메시아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의 손과 언행에 환자들이 위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정말로 선지자 다웠습니다. 병원상황이 제일 피크였던 저저번주 말에 결국 양성으로 자택격리에 들어갔고 그 분의 업무의 상당수가 제게 맞겨졌습니다. 인생은 역시 타이밍 입니다.

PS2 - 백신이 무용? 일수도 있겠죠. 미접종자였던 한 양성환자 분은 갑자기 증세가 악화 되었습니다. 양성이었던 고인은 보통의 사망자 처럼 119 구급차가 오지 않았습니다. 비닐백으로 세상과 차단된 채 가족의 마지막 인사도 듣지 못했습니다.



23
  • 고생이 많으십니다 ㅠㅠ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6129 일상/생각황구야 어서와 (부제 : 드디어 임신했습니다.) 32 쉬군 17/08/20 5313 24
5301 일상/생각쪽지가 도착했습니다. 36 tannenbaum 17/03/27 4614 24
5082 기타홍차상자 우편배달 이벤트 신청자분들 "모두" 읽어주세요. 23 새벽3시 17/03/05 4529 24
7037 일상/생각조카들과 어느 삼촌 이야기. 9 tannenbaum 18/02/02 4420 24
14298 꿀팁/강좌스몰웨딩 하고싶은 티백들에게-1 27 흑마법사 23/11/30 2790 23
13845 도서/문학MZ세대는 없다! 14 R세제곱인생 23/05/13 2775 23
13331 일상/생각박사생 대상 워크숍 진행한 썰 16 소요 22/11/19 3086 23
12763 일상/생각나는 재택 근무에 반대합니다. 24 nothing 22/04/30 4491 23
12592 일상/생각모 중소병원 직장인의 일기 16 자몽에이드 22/03/07 3780 23
12347 일상/생각헌혈하는 것의 의미 9 샨르우르파 21/12/14 3806 23
12332 음악오늘 나는 유치원에, 안 가 21 바나나코우 21/12/07 4243 23
12300 육아/가정쓸까말까 고민하다 쓰는 육아템 3 31 엄마곰도 귀엽다 21/11/23 5013 23
11497 사회우간다의 동성애에 대한 인식과 난민사유, 그리고 알려는 노력. 18 주식하는 제로스 21/03/17 4420 23
11561 일상/생각☆★ 제 1회 홍차넷배 몬생긴 고양이 사진전 ★☆ 41 사이시옷 21/04/08 5137 23
11564 일상/생각홍차넷의 한 분께 감사드립니다. 3 순수한글닉 21/04/08 5186 23
11361 일상/생각내가 맥주를 마실 때 웬만하면 지키려고 노력하는 수칙 46 캡틴아메리카 21/01/21 5370 23
11321 일상/생각자다 말고 일어나 쓰는 이야기 7 Schweigen 21/01/05 4359 23
11259 일상/생각여러분의 마흔은 안녕한가요 27 bullfrog 20/12/21 4770 23
11193 일상/생각할아버지, 데리버거, 수영장 2 사이시옷 20/12/03 3909 23
11049 스포츠르브론 제임스의 우승은 그를 역대 2위 그 이상으로 위치시킬 수 있는가? 16 손금불산입 20/10/14 5786 23
10982 일상/생각나는 대체가능한 존재인가 14 에피타 20/09/23 4820 23
10980 일상/생각고양이 이야기 3 Velma Kelly 20/09/23 4669 23
10296 도서/문학일독김용(一讀金庸): 김용 전집 리뷰 34 기아트윈스 20/02/16 8204 23
10236 창작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5 작고 둥근 좋은 날 20/01/29 5800 23
10020 창작은밀한 통역 2 작고 둥근 좋은 날 19/11/23 5438 23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