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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0/04 16:56:49
Name   랍상소우총
Subject   글로 배운 연애는 어렵다. - 2
교회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쓰느라 피치 못하게 시전된 절단신공에 이은 자비로우신 홍차클러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후속편을 써볼까 합니다. 구글신 우상숭배 건은 야훼 할아버지와 1:1 대담으로 원만히 잘 해결하였습니다. 그분은 참 쿨하셔서 좋습니다.

곧바로 아래에 있어서 링크 걸기도 민망한 인트로는 여기입니다.
https://new.redtea.kr/?b=3&n=1167


...

우리의 구글신께서 말씀하시길, 토요일 오후 시간에 그 영화를 하는 독립극장이 있다는 겁니다. 딱 그 분과 제가 낼 수 있는 시간의 접점에 말이죠. 약간의 문제가 있다면 정말 말 그대로 영화만 같이 볼 만큼의 시간만 있었습니다. 그마저도 제가 뒤에 있을 약속을 절반 정도 째야 할 판이었죠. 어쩌겠습니까. 제 손에 카드가 한 장 뿐인것을. 먹든 죽든 던져야죠. 그래서 카톡을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영화만 보고 헤어지는(..!) 약속을 잡게 되었습니다.

영화는 재미있었습니다. 급하게 그냥 달려서 간 것 치고는 꽤 괜찮았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실시간으로 그 분의 다음 약속이 파토가 나는 걸 지켜보면서 저녁까지 같이 먹자고 지르고 싶었으나 제가 가는 약속이 나름 공식적인 모임이었고 저는 아직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아쉽지만 빠이빠이를 했습니다. 물론 다음 껀덕지를 위해 영화표값은 제가 내놨죠.

카드게임들을 하다가 정신줄 놓고 자기 턴에 가져올 카드를 못 가져오다 보면, 분명 카드 다섯 장으로 시작한 게임에서 나 혼자 카드가 줄어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정줄 잠깐 놓다보면 어느새 손에 카드가 한두 장밖에 안 남게 되기도 합니다. 저같은 경우는 처음부터 카드가 한 장이었기 때문에 턴이 끝나고 필사적으로 다음 카드를 뽑아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카드는 밥약속이었습니다. 둘이 같이 좋아하는 음식을 알아냈고, 언제 한 번 같이 먹자는 기약없는 - 보통 빈말인 - 구두계약을 했습니다. 그리고 식욕이 있는 인간이라면 도저히 안 갈 생각을 할 수가 없는 비쥬얼의 맛집을 찾아내고 말았습니다.

일주일쯤 지나서 뜬금없이 그 음식을 먹으러 가자고 카톡을 했습니다. 다소 부자연스러울 수 있었지만 부자연스러우면 뭐 어떱니까. 그 사람도 저도 애인 없고 주말에 딱히 할 일도 없는데 괜찮은 이성을 만나서 맛있는 거 먹고 놀면 윈윈 아닌가요?

또 주말에 약속을 잡았고, 만났습니다. 만나서 대기를 걸었는데 3시간 반 뒤에나 오라는군요 호오...그래서 그 분이 옷 살 일도 있었던 겸 해서 같이 쇼핑을 갔습니다. 저는 많은 여성들이 많은 남성들에게 기대하는 바와 다르게 쇼핑을 좋아합니다. 제가 살 게 하나도 없어도 완전 잘 따라다니고 뽐뿌도 잘 넣는 편입니다. 그리고 입는 옷마다 잘 어울리기까지 하길래 예쁘다예쁘다 추임새도 넣어주면서 쇼핑을 즐겼습니다. 향수도 보고 뭣도 보고 잘 놀고 식당을 가서 또 맛있게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헤어졌습니다.

이걸 끝내고 나니 이번 턴에는 카드를 두세장 쯤 건진 느낌이었습니다. 이제 관계를 어떻게 지속시킬까 하는 초조함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분을 구워삶을까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걱정스러웠던 건 또 이런 식으로 마냥 '재미있는' 만남만 가지다가 정기적으로 만나는 좋은 여사친 좋은 남사친 관계가 될 수도 있다는 거였습니다. 전 이미 좋은 여사친은 많아서 필요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연애를 글로 배우는 이성애자 남성 피잘러의 선생님들이신 Love&Hate님과 Eternity님의 글들을 복습했습니다. 상황에 딱 맞는 건 아니지만 알아두면 좋은 게 많으니까요. 그 중 Love&Hate 님의 '카톡으로 남녀관계를 진전시키는..' 이라는 글(http://pgr21.com/?b=8&n=50710)을 눈여겨 봐뒀습니다. 아무리 글로만 연애를 배웠더라도 써먹기 참 좋은 소재라는 건 이과생인 저도 압니다.

여간 그 뒤로 한 번 정도 또 뜬금없는 만남을 가지면서 지금 이 분이 그린라이트는 아니더라도 빨간불은 아닌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계속 엑셀을 천천히 밟기로 했습니다(결과적으로는 너무 쉽게 생각한 게 지금 상황을 조금 더 고난이도로 만든 것 같습니다). 추석 연휴 중에는 맨날 카톡 끊기던 사람이 먼저 카톡을 하기도 했습니다. 연휴가 끝나고, 같이 또 개봉한 영화 한 편을 보기로 했습니다. 그게 어제였지요.

영화를 보기 전에 또 제가 아는 맛있는 집을 가서 밥을 먹고(평소에 맛집왕 이미지와 그에 걸맞는 실력을 잘 구비해 놓으시면 유용합니다) 영화를 봤습니다. 바빠서 다음 일정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어제는 마침 불꽃축제가 있었던 날이었습니다. 사람 많을 거 다 알지만 그래도 한 번 가 보기로 했습니다. 먹을 것과 담요를 사서 노들역으로 갔습니다.

다 우리같이 무계획인 사람들인건지 노들역을 가는 커플과 가족들이 참 많았습니다. 틈을 비집고 다리에 좋은 자리를 구해 둘이 쪼그리고 앉아서 불꽃놀이를 기다렸습니다. 쌀쌀한 강바람에 담요 하나는 깔고 하나는 같이 덮고, 같이 음악도 들으면서 멋진 불꽃놀이를 봤습니다. 비긴어게인 보고 혹시나 해서 사놓은 스플리터랑 이어폰을 집에 두고 온 게 아쉬웠지만, 그런데로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불꽃놀이가 끝난 뒤엔 둘다 대충 먹어서 출출한 배를 붙잡고 심야식당을 가서 밥을 먹었습니다. 거의 열 시간 정도를 함께 보내고, 각자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위에서 봐둔 그 카톡신공을 지금 쓸 타이밍이었습니다. 실제로 얼마 전에 제가 소개팅 하나를 깠기 때문에 거짓말한다는 죄책감도 없었고요. 집에 들어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카톡을 보냈습니다.


원래 두 편 정도로 끝내려고 했는데 공교롭게도 버스가 집에 도착했네요. 다음 편은 아마 오늘 밤에 욕조에 몸을 담그고 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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