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8/10 19:26:38
Name   머랭
Subject   엄마와 나
지금 몇시지.
그렇지만 시간은 보면 안 돼.

식은땀이 흘렀다. 이대로 핸드폰을 보면 끝이다. 여섯 시간쯤 잠이 들지 않으면 허리가 아프다. 허리부터 아프더니 어깨가 꽉 짓눌린 것처럼 쑤시기 시작한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병원을 갔던 게 벌써 일년 전이다. 불면증은 사라졌다가도 별안간 돌아온다. 이제는 꽤 익숙해져서 병원에 간다. 이건 수면제는 아니고요. 항불안제입니다. 약을 받았더니 잠이 잘 온다. 그런데 악몽이 시작되었다.

방을 바꾼 그날부터였던 것 같다. 눈을 감으면 잠이 온다. 이 당연한 개념이 나에게는 생소해서, 처음에는 잘 자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내 방에서는 악몽을 이렇게 자주 꾸지 않았다. 내가 있던 방은 굴 같았다. 작고 포근한 방이 그대로 나를 감싸주는 것 같았다. 괴로울 때면 어린애처럼 이불을 뒤집어쓰면 더 안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방문만 닫으면 나는 안전해지는 것 같았다. 친구들에게 나는 내 방에 있다고 말하기 보다는 내 굴에 있어. 그렇게 말하고는 했다.

엄마와 다투게 된 건 바로 그 이유에서였다. 좀 더 넓은 방으로 옮긴다는 아주 합리적인 계획이었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한달쯤 싸웠고 늘 그렇듯 내가 포기했다. 아주 정직하게 말하자면 새 방이 좀 더 수납공간도 많았고 편안한 공간이었다. 분명 그래야 맞는 거였다. 그 방에서 처음 잠들었던 날부터 나는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아주 현실적인 꿈이었다. 일을 하다가 항상 곤란한 상황이 생긴다. 현실에서는 때때로 재수없을 뿐이지만, 꿈에서는 꼭 코너까지 몰리고 만다. 어떤 문제든지 해결하려고 애쓰다 꿈에서 깨고, 그런 게 열흘 이상 계속되다 보니 이제는 꿈과 현실이 분간이 잘 가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선생님. 저 못 견디겠어요. 병원에 찾아와 그런 이야기를 했다. 새로운 약을 받아 돌아오면서 새 방과 내 굴을 생각했다. 방을 바꾼 뒤로 나는 때로 내 굴에 들어가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고는 했다. 이제는 창고처럼 변해버린 내 굴. 앉을 공간도 부족했지만 나는 거기에 있고 싶었다. 고양이가 멋대로 점거한 내 굴에는 더 이상 내가 있을만한 장소가 많지 않았다. 그런 생각만 하니 사람이 깊이 늪에 빠지는 기분이라, 이 기묘한 습성이 어디서 왔는지 찾아 보기로 했다.

분명히 이 우울증과 불안, 그리고 굴을 좋아하는 이 습성은 모계혈통이다. 엄마의 이모의 아들, 이걸 정확한 용어로 뭐라고 하더라. 그 분은 천재라고 들었고, 아주 젊은 나이에 자살했다. 그 분 말고도 많아서 또 누가 있는지 모르겠네. 엄마가 그렇게 말했다. 내 안에 있는 우울과 불안은 엄마 안에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다. 다만 그걸 표출하는 방식이 아주 다를 뿐, 나는 엄마에게서 내 모습을 보고는 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그녀를 쭉 위로해 왔지만 그녀에게서 그런 위안을 얻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녀만이 아니라 나도 일그러져 있을 뿐이다.

한달쯤, 방을 바꾼 뒤에도 나는 그녀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녀만이 공격적인 것이 아니다. 나는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화를 냈고 그녀도 그건 눈치를 챘지만 뜻밖에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럴 때면 내 새로운 방과 그녀의 방 사이에 있는 복도에 묘한 침묵이 감돈다. 주로 그녀는 집요하게 캐묻는 쪽이지만 나는 그걸 절대로 말해주지 않는 편이다. 고집부리는 게 똑같다. 유전자 검사같은 건 안 해도 될 정도다.

왜 나와 살지 않아요? 정신과 의사가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엄마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고 나면 나도 무너질 테니까. 엄마와 나는 어설픈 감정 위에 서 있다. 한발짝이라도 서로 뒤로 가면 이게 무너질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꿈을 꾸면 늘 내가 주저앉아 버린다. 한 발짝이 아니라 세 발짝 쯤, 완전이 균행이 무너진 채로. 눈을 뜬 뒤에 바로 일어나지 못한 이유는 분간하기 위해서다. 아직 괜찮은지, 전부 괜찮은지, 엄마는 괜찮은지, 그리고 나도 좀 괜찮은지에 대해서.

엄마와 나는 흔들다리 위에 서 있다. 누구 하나라도 머뭇거리면 떨어지고 만다. 그런 이야기를 정신과 의사에게는 차마 할 수 없어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가족이니까요.



11
  • 가족ㅠㅠ 요즘 많이 느낍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414 요리/음식텀블러랑 워터보틀 나눔합니다 (마감) 56 먹이 19/07/09 5751 26
7984 오프모임(펑) 17 먹이 18/07/31 4459 5
12788 오프모임(급벙) 약속 터진 김에 쳐 보는 벙 33 머랭 22/05/07 3858 1
12629 일상/생각나는 네 편 9 머랭 22/03/15 3991 39
12155 일상/생각약간의 일탈과 음주 이야기 2 머랭 21/10/11 3298 15
11399 일상/생각어떤 여자아이에 대한 이야기 3 머랭 21/02/06 4462 15
11228 일상/생각우울증과 나 1 머랭 20/12/15 4186 11
11171 일상/생각모 바 단골이 쓰는 사장이 싫어하는 이야기 6 머랭 20/11/26 3841 25
11031 일상/생각그렇게 똑같은 말 1 머랭 20/10/06 3715 17
10850 일상/생각엄마와 나 1 머랭 20/08/10 5310 11
10642 게임파판7 리메이크, 남의 셀카 엿보는 것 같은 게임 5 머랭 20/06/02 4145 10
9785 일상/생각편의점 대타 중인데 생각보다 적성에 맞네요 10 맹고 19/10/06 4627 3
9537 기타집에 권연벌레 나왔어여...기분이 좋지않네요 4 맹고 19/08/11 31478 0
3538 영화보다 나는 국산 아니메. <카이 : 거울 호수의 전설> 2 맷코발스키 16/08/20 5328 1
2807 영화곡성 - 말하지 않는 것의 미덕(미리니름 有) 4 맷코발스키 16/05/14 3936 1
1682 영화크림슨 피크 후기 4 맷코발스키 15/12/02 6954 1
1471 영화검은 사제들 후기(미리니름 쬐금) 9 맷코발스키 15/11/05 10281 5
11741 사회낯선 과학자, 김우재씨의 정치 사설 5 맥주만땅 21/06/01 4110 10
11160 여행유머글을 보고 생각난 플 빌라 이야기 7 맥주만땅 20/11/22 4401 3
10756 사회위력을 보았다. 84 맥주만땅 20/07/07 8731 11
8958 기타펠리세이드 3.8 AWD 4천 km운행기 17 맥주만땅 19/03/13 12280 16
8912 정치주성하기자의 이번 북미회담에 대한 평가 11 맥주만땅 19/02/28 5353 6
8286 의료/건강건강한 노인들에게 저용량 아스피린을 장기 복용하면 어떻게 될까. 4 맥주만땅 18/09/27 6678 3
8163 경제베네수엘라 경제위기와 꺼라위키 12 맥주만땅 18/09/03 6973 0
8028 의료/건강박서 팬티를 입는 것이 남자의 정자 운동성과 정자수의 증가에 도움을 줍니다. 20 맥주만땅 18/08/09 6468 3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